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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주신 지상명령 운영자 201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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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7~28, 1819절 아브라함에게 주신 지상명령

 

<문화 명령 속에 담긴 2가지 지상명령>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하셨습니다

이는 흔히 문화적 명령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 문화적 명령 속에 두가지 큰 줄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에게 준 명령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직적 관계에서 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평적 관계의 명령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수직적인 번성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번성을 의미한다. 주어진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것 이것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복음의 두 측면>

오늘날 성경이 우리에게 남겨준 두 가지 큰 명령이 또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명령과 동시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앞엣것은 수직적인 명령으로써 믿음의 가정에 주신 말씀 맡은 자로써의 사명을 말합니다. 곧 말씀으로 가문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엣것은 수평적 명령은 복음으로 온 땅에 충만하고, 복음으로 온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유언을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 땅에 전해 진 이래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명령순종의 불균형이 있어 왔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수직적인 명령과 수평적인 명령은 모두 중요합니다. 가정을 향한 명령도 중요하고 이웃과 열방을 향한 명령도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받은 이후에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세계로 세계로 나아가는데는 매진해 왔지만 정작 내 자녀 내 가족을 선교하는 일에는 등한시 해 왔습니다. 거기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해진 곳에 사회가 발달하고, 국력이 증대되고, 나라가 잘살게 되기는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런 와중에 가정이 해체되는 곳이 많고, 자녀들은 교회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지난 수요일에 예를 들었던 영국 웨일즈의 부흥운동이다.

 

1904년 이반로브츠라는 젊을 부흥사로 인해 시작된 웨일즈의 부흥운동은 전국을 향해 번저갑니다. 복음을 들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한달만에 37천명, 5개월 만에 10만명의 불신자가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시내에 술집이 없어지고 범죄자가 줄어들어 교도소가 텅텅빌 정도입니다. 기도회를 하느라 그렇게 좋아하든 축구경기가 열리지 않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남아 남미까지 번져간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지원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당시 그렇게 부흥하여 세웠졌던 큰 건물에 사람이 없어 텅텅 비어 있었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라고는 머리가 허연 노인들뿐이었습니다. 드리는 예배도 건조해져 있었고, 큰 예배당은 관광 상품화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실제상황입니다. 웨일즈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모든 나라가 이 지경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많은 전도인들이 세계로 세계로 외치며 밖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정작 가장 먼저 돌보아야 할 자기자식을 기르고 제자삼는데는 실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이야기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말하는데 초대교회의 무엇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지금 초대교회를 가보면 흔적도 제대로 찾아볼 길이 없다.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아시아의 일곱교회 모두 어떻게 되어 있는가? 교회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고 무슬림 회당이 들어서 있던지, 아니면 공허한 먼지만 날리고 있다. 이후 전해진 유럽구라파 교회는 어떠한가? 해마다 무슬림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가 되고 말았다. 미국교회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도 지금 그런 분위기에 진입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가 무엇이냐 하면 한 시대에 그 나라에 부흥이 일어나면 그 촛대가 오래가질 못하고 다른 나라로 옮긴바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한 시대가 지나기 전에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21세기 교회성장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성장률은 60년대 207% 70년대 125% 80년대 25% 90년대 8%미만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1996년대 1200만명을 자랑하던 기독교 인구가 2006년에는 기독교인이 862만명이었어요. 이는 10년 동안 338만명이 줄어든 수치입니다.. 앞으로 그 수가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주일학교는 더 심합니다. 우리나라 모교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주일학생수가 15만명이나 줄어들었다고 봅니다..

미국에 있는 동포의 경우 2세 종교교육이 더 심각합니다. 동포 2세대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70%가 교회를 떠나고 대학을 졸업하면 90%가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유학 함부러 시킬 것 못되요!! 그야말로 쏭이라는 신학자가 말한 침묵의 탈출이 시작된 것입니다.

타 민족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자신의 자녀와 후손에게 말씀을 전수하는데는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신약의 지상명령을 준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상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지상명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의 지상명령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주신 지상명령이 있었다면 구약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자손손 말씀을 전수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신약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평적 전도에는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고 관심을 많이 가졌지만.. 정작 가장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수직적 전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 자식을 내가 가장 먼저 제자삼아야 하는데 내 자식을 제쳐두고 세계선교 세계 전도에만 관심을 가지니, 한 세대 두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되면 교회에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민교육>

이 말씀을 가장 무겁게 받고 지킨 족속이 바로 남은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무려 4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손대대로 전수하는데 성공한 민족이다.

430년 이집트의 종살이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며 유리하며 방황하는 가운데서도, 나찌에 의해 6백만명이나 되는 동족이 처참하게 암살당하는 그런 핍박 가운데서도 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살아남습니다.

어디서 그 힘이 나오는가? 구약의 지상명령인 자자손손 말씀을 전수하라는 그 명령을 목숨 다해 지켜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쇠사슬 예화 <그림!!>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속담 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수천년 동안 계속 자녀들에게 전수하며 지켜왔다. 따라서 지금도 수천년 전과 같은 유대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각 세대들이 긴 쇠사슬의 고리처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말은 무슨 말씀이냐?

만일 어떤 세대의 유대인이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쳐 전수하지 않았다면, 쇠사슬의 그 고리 하나가 망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쇠사슬일지라도 그것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설명>

그렇다면 이 유대인을 온전히 하나로 이어주는 쇠사슬.. 말씀을 가르치는 이 교훈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민족적으로는 모세로부터 주어진 쉐마 이스라엘에서 찾을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쉐마교육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토라교육을 위한 핵심 명령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을 나이가 되면서부터 토라에 꿀을 발라 아이에게 먹인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처럼 맛있게 먹고 가까이 하라는 뜻이다.

그 본문을 한번 보게 되면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앞으로 이 쉐마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유대인을 유대인 되게 만든 핵심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모든 저자는 유대인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 삶의 토대 위에 살았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어릴적부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웠으며 부모로부터 쉐마 본문을 가슴속에 세기도록 교육받았고 토라의 모든 내용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교회를 다니고 불만 받으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도 사람을 부르시고 쓰기도 하신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은 어릴적부터 부모로부터 철저한 말씀과 경건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준비된 영혼을 쓰신 것이다.

 

우리는 내 자녀가 큰 인물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축복받는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지만 정작 이 쉐마명령처럼 내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 어릴적부터 준비시켜 나가는데는 무관심하지 않는가?

교회학교에 보내면 의례히 말씀의 사람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착각 가운데 살아가지는 않는가? 교회가 자녀들에게 울타리는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그런데 그것도 오늘날에는 너무 힘들다) 그러나 자녀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복음전하는 사역도 감당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내 자녀에게도 말씀을 가르치는 그런 부모가 되도록 삶의 페턴을 바꿔야 한다.

<구약의 지상명령 - 아브라함의 자상명령>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이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다. 본문을 한번 읽어보면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내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즉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것이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원하시는데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그의 자손대대에 여호와의 도를 가리켜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믿음만 본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만 전수해 준 것이 아니라.. 구약의 자상명령까지 함께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개인적 지상명령이 역사를 흘러 모세에게까지 흘러가게 되었고 그것이 모세를 통해 민족적인 명령 쉐마명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지상명령을 받은 시점>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받은 시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여호와 도를 자손들에게 전수하라고 명령을 받은 시점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19절을 이어 20절을 보십시오.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아직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점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자손과 권속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로 작정하고 나서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떤 도시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소돔과 고모라는 인류역사상 타락한 공동체의 표본입니다. 그런데 이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기 바로 앞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도를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신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왜 망했는가? 거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곳은 조카 롯이 머물던 곳입니다. 그런데 롯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는 말씀은 전혀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식들에게 말씀을 전수했다는 말조차 없다.. 롯의 이야기를 보면 아내는 소돔의 부와 명예를 사랑하다가 소금기둥이 된다. 두 딸은 소돔의 세속에 물들어 아비와 근친상간을 하여 자식을 낳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말씀 맡은 자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모든 사건을 목격한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이구나. 나 혼자 잘 믿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닌 것이구나. 이 세상은 결국 타락하고 말 것이지만 나에게 세상보다 큰 자식이 있구나!! 내 자손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전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 아브라함에 말씀을 미리 주신 것은 바로 그것을 교훈하고자 하심이었다.

 

다시 한번 더 그 명령을 읽어보게 되면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다. 아니 가슴 깊히 새길 수 밖에 없었다. 여러분이 만약 내 눈 앞에 이 소주공업원구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내려와 사람들을 다 살라버리고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면 어떻겠는가? 그 엄청난 타락 앞에 그 엄청난 심판 앞에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낳게 되는데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가 청년이 되도록 까지 다른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22장에 하나님이 느닷없이 나타나시어 뭐라고 말씀하느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2절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브라함이 놀라운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그 명령에 일언 반구하지 않고, 사라와 어떤 의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해 종과 아들을 데리고 지시하신 땅으로 간다.. 그리고는 산꼭대기로 가서 제단을 쌓아 아들을 결박하고 실제로 그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이 중간에 가로막아 죽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니 바칠 생각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100세 때 기적같이 아들을 주신 분이시기에 데리고 가시더라도 다시 살리실 분이심을 믿은 것이다.

 

<순종의 아삭>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아들 이삭의 반응이다. 이삭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비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그 어떤 의문을 표하지도 반문하지도 않는다. 그는 전적으로 따른다. 클라이막스가 바로 아비가 자신을 죽이는 장면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130살이 넘은 완전 노인이다. 그런 분이 지금 자신을 결박하고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하나님이라지만 보통사람 같으면 아버지를 향해 이 어른이 노망이 들은 것이 아닌가? 제 정신인가? 이런 생각하며 반항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삭의 행동속에 그 어떤 반항도 없다.. 전적인 순종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다.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이 놀라운 순종의 행위를 통해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의 믿음, 순종. 헌신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비 아브라함의 말씀 맡은 자로써 사명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소돔고모라 멸망 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명령.. 구약의 지상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매우 무겁게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가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특별히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나오지만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말씀 맡은 자로써 이삭에게 온 몸과 정성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했을 것이다. 믿음의 가문이 여기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그냥 위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말씀을 전수하는 자로써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노력의 결과입니다. 아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가르치려면 먼저 자신이 그 도를 지켜야죠.. 내가 순종해야죠.. 내가 순종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또한 이삭의 이 순종과 헌신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듣고 배운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이삭은 아비 아브라함이 죽으라고 해도 죽을 정도의 순종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힘입니다..

 

<결론>

오늘날 내 자식 잘 길러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세상의 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다..다른 사람이 아닌 부모인 내가 키워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 가슴 깊이 새겨 가정이 복을 받고 교회가 복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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