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드리는 예배 | 운영자 | 2013-02-22 | |||
|
|||||
이사야1장10절~20절 삶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에 관한 말씀을 계속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우리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곳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도 계시고 직장에도 계시고 우리의 학교에도 계시지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소에도 계시고 다투는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를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 편재성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바르게 살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체험담입니다. 이 목사님이 어느 시골교회 부흥회를 하러 가서 새벽예배를 인도하는데 한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도 열심히 하고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중간 중간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예배를 마친 후 개인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 맨 마지막에 나갑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의 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다 가고 조용한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밖에 나가보니까 바로 그 할머니가 동네 사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이 할머니가 새벽예배 마치고 돌아가다가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다 들켜서 싸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겁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이런 생각을 하시죠? 그런데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그렇게 열심히 봉사도 하고 말씀도 듣고 하던 사람이 집에만 딱 도착하면 냉정을 잃어 버립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인자하든 모습은 온대 간대 없고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짜증내고 화내기 일쑤입니다. 이런 모습은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른 신앙은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구별되는 삶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예배는 한 시간을 그럴싸하게 연출하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드려진 우리의 예배가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일관되어 질 때 그것이 참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행일치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만일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나의 모습과 가정이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잘못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배에 관한 세 번째 메시지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예배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본문설명> 본문은 B.C. 8세기에서 7세기경에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남쪽 유다 왕국의 실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민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쪽 바벨론 제국의 힘이 점점 강성해져 침략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임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신앙적으로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이런 부패와 타락을 예배의 타락과 연관시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예배의 타락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예배회복에 실패하고 말았어요.. 예배에 실패한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지 못한 채 끝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B.C. 586년에 있었던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사건입니다. [1]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예배 : 삶의 열매가 없는 예배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이사야 1장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봉독해 드린 말씀 중 10절~15절을 보면 당시의 신앙과 예배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눈에 선합니다. 우리가 봐도 한심한 지경인데 언제 어디서나 편재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10절 보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도시입니까? 죄악이 극에 달했던 그런 도시가 아닙니까? 창세기 19장 보면 소돔은 음란하고 잔혹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위 선민이라고 하는 유다 민족이 그런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들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5절 보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여기서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들의 범죄가 심각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폭행, 살인, 부정, 부패, 거짓, 사기, 음란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들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받아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들도 이런 말씀이 계속적으로 나타납니다. 11,12절 보십시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져와도 그것이 하나님께 하나도 유익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제물들은 바른 제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3절,14절에 계속해서 말합니다.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그 제물은 헛된 제물입니다. 즉 죄악을 행하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가져오는 제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가증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천번 만번을 드린들 그것을 내가 좋아하지 않고 무거운 짐만 될 뿐이라고 하세요. <예화> 제가 어떤 집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해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또 다양한 일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죠!!. 굶고 살 지언정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족 친지들이 출석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그 교회의 기둥들입니다. 참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요, 십일조도 참 많이 합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 생활도 많이 하니 겉으로 보면 참 귀한 일꾼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술집을 운행하는 것입니다. 친지들이 비슷한 업종에 근무하다 보니.. 누가 뭐라고 말도 못합니다. 밤에는 술과 여자를 팔아 돈을 벌어서 주일 되면 그 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헌금 바치고..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 사람 앞에서도 부끄러운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께 감히 가지고 나아와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보여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빤히 보고 계시는데 그런 죄를 짓고 있음에도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은 채 예배만 드리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받을 수가 없지요!! [2]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 삶의 열매를 드리는 예배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모든 예배 순서, 예배 요소와 더불어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삶이 동반되지 않은 예배는 엉터리 예배입니다. 그런데 삶을 동반하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죠!! 마음은 있지만 육신이 약하여 우리는 수시로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그것 알고 계세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안 돼!! 그러면서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달려 나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잘해야지 결단하라는 겁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거룩해지고 좋아집니다. 그걸 가리켜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그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에 안수집사를 수십년 동안 하고 계시는데 이분이 장로가 되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장로가 되질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도 있고 하니.. 장로로 피택을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절을 해 버립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분이 하시는 일이 술을 팔아서 납품하여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군대에서 눈을 다쳐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고 측면으로 보이는 그런 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할 일을 찾다가 어떻게 그런 일을 시작했는데 이게 돈이 되는 거여요!!(원래 죄짓는 일은 쉽게 돈이 잘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때 끊어버리지 못하다 보니.. 평생 동안 못 끊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좋은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성령이 감동하시면 그때 앞뒤 가리지 않고 끊어 버리는 자입니다. 이것저것 재다보면 평생동안 못 끊습니다.. 이분이 자식도 길러야 하고 나이 먹어 이것 그만두면 뭐 먹고 사나!! 이 생각 하다가 평생동안 끊어버리지 못하고.. 지금 연세가 벌써 칠순이 넘어버렸어요.. 16절~17절 말씀을 보십시오.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성령이 감동하실 때 속히 나쁜 행위를 씻고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행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겁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18절은 또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여기서 ‘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쿠 나’인데 이 말은 본래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일어나라고 지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재판장의 입장에서 죄를 지은 유다 백성에게 일어나 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고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이 말은 역시 법정 용어로 논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정죄하여 감옥에 집어넣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가려 그것을 고치시며 회개케 하시어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라!!’고 하세요. 그리고는 ‘서로 변론하자’고 하세요..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나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여 돌이키기만 하면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초청에도 불구하고 만일 회개치 않고 죄를 그대로 품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받지 않고 그 예배를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사59:1~2 보면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편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고도 먼 관계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부관계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죄가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다면 그들 사이는 한없이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도 생각나는 죄가 있으면 미리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깨끗이 사함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숨겨둔 죄를 간직한 채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인터넷 신문에 재밌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KT 대전지사에 한 중년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20년 전 공중전화를 쓰다가 동전을 넣지 않았는데도 통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다!!하고 별 생각 없이 이곳 저곳 생각 나는 곳에 여러통의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나이가 들어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려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편지를 쓰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는 용서를 구하면서 10만원 짜리 수표를 동봉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정도 일 가지고 뭐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은 참 귀한 모습이 아닙니까?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오늘 우리가 드릴 예배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를 생각할 때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성도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 예배’가 있습니다. 이 때는 구별된 시간에 구별된 장소에서 영과 진리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순간이든 어떤 장소이든 하나님을 의식하며 드리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 즉 ‘생활예배’입니다. 롬12:1에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육체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공예배 외에 매일의 삶이 예배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실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예배에 와서 “하나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 마치고 가면서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일에 또 뵙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죠. 그런데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당을 빠져나가면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신없이 제 마음대로 바쁘게 살다가 주일에 성경책 끼고 와서 예배나 드린다면 “하나님, 안녕하세요?”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하는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센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주일만 지키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일도 빼먹는 사람이 늘어나 이 말이 큰 흉이 아닌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썬데이 크리스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에브리데이 크리스천(Everyday Christian)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만, 예배의 현장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 날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순간 순간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 예배로 드리기 위해 구체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해 드립니다. ① 말씀에 순종하는 삶 : 우리는 무엇보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롬12:2에 보면 삶의 예배를 드리는 자를 향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으로 분별합니까?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주님의 말씀이 내 길을 밝힐 때 아름다운 생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항상기도 :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안내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엡6:18)” 주일만 기도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며 살라는 것이다.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수련원인 예수원에 가보면 이런 글귀를 발견할 수 있어요(확인!!!)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라!!” 생활예배를 위해 기도는 필수입니다. ③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삶 : 우리는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일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 외에 있는 곳곳에서 맡은 일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 빼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틴 루터도 이런 말을 했죠. “우유를 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의 젖을 짤 수 있다.” 이 말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 같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④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 :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작은 선행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히13:16 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일이 곧 주님께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면서, 목마른 아이 물 한 컵 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께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칭찬받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이 복음 전도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벧전 2:9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무슨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즉 예배자는 공예배 가운데 예배드릴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드릴 생활예배입니다. <결론> 여러분! 지난 3주간에 걸쳐 예배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그 말씀들을 꼭 마음 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①예배가 여러분 인생의 중심이 되도록 하십시오. ②그리고 예배가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담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③그리고 예배가 위선이 되지 않도록 평소의 생활 속에서 모든 삶을 산 제사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축복하시는 승리의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