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중심의 신앙생활 | 운영자 | 2013-02-22 | |||
|
|||||
창세기 12장 7절~9절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 새해가 벌써 열흘이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새롭게 출발하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 신앙도 다시 한번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던 것도 오래 동안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기 쉽고, 느슨해질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나사를 꽉 조여 놓아도 시간이 흐르면 헐거워집니다. 그래서 수시로 확인하고 다시 조여 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분은 물론이고 오래 된 분들도 신앙의 기본을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된 분들에게 이런 과정이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기 때문에 기대가 있고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운대로 따라하기 때문에 기초를 잘 다지기만 하면 신앙이 쑥쑥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한지 오래된 사람들은 기본이 되어 있다고 하나 거기에 나사를 다시 조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느슨해져 버립니다. 굳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요. 특히 오늘날 같이 세속주의가 강하게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이단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넘어져 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 플루트 연주가인 제임스 길웨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유명한 연주가인데 나이 50세에 이르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매일 몇 시간씩 기본 음계를 연습하면서 자신을 점검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 페이스를 찾은 후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곡이든 척척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엉뚱한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본음계는 어처구니없이 부자연스러웠고, 조가 바뀌면 나도 모르게 흐트러지곤 했습니다.” 여러분, 노련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가는 늘 기본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해보고 싶습니까? 칭찬받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의 가장 기본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가장 근본이요 핵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참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의 시작은 예배로부터입니다. 이 예배 안에 신앙의 모든 교훈과 은혜와 축복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3회에 걸쳐 예배와 관련된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의 예배 생활을 재점검하시고, 더욱 아름다운 신앙과 복된 인생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예배가 인생의 중심인 이유 : 인간 창조와 구속의 목적 먼저 예배란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공식 예배는 물론이고, 넓은 의미로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 말하는데, 그 단어는 두 개의 말에서 유래합니다. worth(가치있는)+ship(신분)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신 분이므로 그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행위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인생의 중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다.(창3:5) 이것이 인간의 근본 죄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복을 누리는 법인데, 하나님 대신 자기가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죄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다니요!! 결국 범죄한 인간은 예배의 실패자로 전락하고, 생명과 축복의 길 대신 사망과 저주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 인간을 영원한 사망과 저주의 길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예배자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다름 아닌 예배의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엡1:5~6을 보면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런 까닭에 장로교회 교리를 요약해 놓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1문에 보면 무슨 말이 나옵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참 예배자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곧 신앙의 대가인 것입니다. [2] 예배가 인생의 중심이었던 사람 : 신앙의 대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말은 우선 하나님 백성의 시조라는 뜻이죠. 동시에 신앙의 모델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자손손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 마땅한 신앙의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감히 ‘신앙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예배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대아 우르는 문명의 중심지인 반면, 가나안 땅은 낙후된 지방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문명이 뒤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거기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환경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불안한 환경. 힘든 환경을 극복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예배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의 신앙의 중심이 예배였던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절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합니까? 후반절 봅니다. “~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희생 제사는 대속을 의미하는 피의 제사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면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척박한 땅에 와서 힘든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을 굳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 안에서 다른 곳으로 자꾸 이동합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아마 원주민이 차지하고 있는데다 땅의 형편이 좋지 못하니까 여기 저기 쫓겨 다닌 것인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유목민 생활을 한 겁니다. 참 속상하는 형편이지요.. 안정되게 한 곳에 정착한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자꾸 옯겨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불안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 때문에 불평을 한다든지, 신세한탄 한다든지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는 옮겨다니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늘 예배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8절을 보십시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는 늘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는 잘되고 형통해도 예배로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고.. 뭔가 좀 안되고 불안 불안해도 그곳에서 낙담하거나 주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그곳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예배에 있어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 번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신앙을 시험하려고 모리아 산에 가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시험이었어요. 비교적 평안하고 잘 살 때입니다. 걱정 염려가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집니다.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나에게 가지고 와 그것으로 예배드리라는 거여요. 절대순종을 요구하는 거여요.. 이때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진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그를 잡아 바치려고 합니다. 예배에 순종하는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아브라함이었어요. 이 모습을 하나님은 가볍게 보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급하게 그를 막으시며 말씀하십니다“네가 이처럼 가장 귀한 독자도 아끼지 않고 내게 예배하였으니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 씨가 번성케 해 주겠다.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예배를 통해 참된 복이 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아브라함의 예배를 통해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횟수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옮겨갈 때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배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배와 생활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교회에 예배가 너무 많다고 비판을 합니다. 외국교회는 주일날 한번만 모이면 되는데 한국에는 왜 이리 예배가 많은지.. 일주일 내내 새벽예배가 있고, 그것도 모자라 수요예배, 금요예배, 목장예배, 주일도 1,2부 예배, 대부분 한국에는 오후에도 예배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심방예배, 개업예배, 돌예배, 회갑, 칠순, 팔순, 장례예배 등등.. 하라면 계속해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긴 많아요.. 그런데 예배가 많다고 나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일상입니다. 그 기회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너무 기복적으로 형식적으로 흐르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본질을 잘 지킨다면 횟수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디서든 자주 예배하면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는 시간입니다. 그분을 만나서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드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은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이 싹트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히 더 넓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결과적으로 우리 영혼도 잘 되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금년에는 예배의 횟수를 늘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초신자분이라면 처음부터 예배 많이 드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세우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신자라면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예배 생활에 게을러지지 않았나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예배에 빠지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예배 생활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날마다 어디서든 예배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예배의 질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하는 예배자 였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어디는 가든 무엇을 하든 제일 먼저 단을 쌓고 최선을 다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심지어 독자 이삭까지 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인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다. 그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그렇다. 예배가 우선이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신다. [3] 예배를 통해 최상의 복을 누린 사람 : 복의 근원 아브라함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풍성한 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인생이 예배 중심의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자 아브라함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된 성도만이,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정말 큰 특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위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신앙과 건강, 그리고 시간입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결여되었다면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예배 중심의 삶을 통해 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했던 모든 말씀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창12:2~3을 보십시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정말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수효도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이 넘쳐서 남에게 나눠주는 복의 통로가 되었어요. 특히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족속이 구원의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복’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복은 ‘베라카’인데, 어원 상으로 ‘무릎 꿇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곧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무릎꿇고 예배하는 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가지는 말합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승리자는 인생의 승리자요, 예배의 실패자는 인생의 실패자이다!” 예배는 복과 저주의 갈림길입니다. 예배에 의해 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인물들이 예배에 승리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반면 예배에 실패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무일상 7장을 보면 사무엘이 사사가 되자 마자 백성을 모으고 미스바 성회를 가집니다. 예배한 겁니다. 그때 숙적 블레셋이 침략해 왔지만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셨습니다. 반면 동시대 인물인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 엘리의 아들로 본인들도 제사장이었지만 그들은 예배를 가볍게 여깁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드립니다. 결국 예배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를 만듭니다. 그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가인도(창세기 4장), 사울왕도(사무엘상 15장) 예배에 실패해서 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만 특히 주일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특별한 날입니다. 주일 예배는 결코 빼먹지 마십시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의 연장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재창조를 이룬, 즉 구속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일은 부활 기념일이요 구원기념일입니다.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고 예배하는 날인 동시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날입니다. 창2:3 보면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인간이 창조된 후 처음 맞이한 날이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복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우신 축복의 원리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인간 스스로 얻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127:1~2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달력을 볼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먼저 빨간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고, 그 후에 검은 날 세상으로 나아가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에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그 결심 가운데 예배에 관한 결심을 포함시키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예배 중심의 인생으로 승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예배 중심의 인생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나아가 복된 인생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