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3-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 운영자 | 2013-01-08 | |||
|
|||||
누가복음 2장 1절~ 7절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들어가면서> 저희 집에 큰 아들을 빼고 나머지 두 아들은 maid in china입니다. 그리고 born in china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권에도 상하이를 나타내는 SH로 시작이 됩니다. 먼 곳도 아닌 가까운 구룡병원에서 태어났어요. 지난 여름 두 아들을 전동차에 태우고 수영장을 가는데 둘째 아들이 태어난 구룡병원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둘째 녀석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빠 제가 저기서 태어났죠? 그래 너는 거기서 태어났어!! 그러자 큰 아들이 그 때를 놓칠새라.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하면서 자기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막 자랑을 하는 겁니다. 그러자 제가 재치있게 네 동생은 네가 태어난 곳 보다 훨씬 큰 나라, 큰 병원에서 났어야!! 그러면서 웃으며 넘어갔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모국에서 좀 더 좋은 여건에서 낳는게 더 좋았나!! 이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요즘은 출산율도 낮고 자녀도 많이 낳지 않기 때문에 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미국을 가기도 하고, 가장 좋은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가더라도 좋은 병원 좋은 시설을 이용하려는 그런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부끄러운 것인가? 알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어떤 곳에서 태어나셨나요? 양우리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마굿간에서 나신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들과는 비교 불가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 어떤 사람의 탄생과 달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의 생애는 결코 그의 탄생의 수준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기억해 주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궁핍하고 가난한 환경 가운데 태어났어도 모든 인류가 기억해 주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의 배경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때는 로마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가이사 아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고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식민지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한 합니다. 이에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도 호적을 하기 위해 요셉의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갈 어떤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늘 같으면 차를 타고 옛날 추억 생각하며 드라이브라도 하고 올 수 있겠지만 당시는 그 먼 거리를 일부러 갈 일이 없어요.. 그런데 황제의 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에 가야 했습니다. 그것도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그런데 놀랍습니다. 이 요셉의 발걸음이 700여년 전에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 약속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여러분, 하나님은 역사 속에 당신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사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를 통하여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마리아와 요셉처럼 나를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일을 이뤄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 땅에 오심을 환영하며 찬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현장을 보면서 우리들 또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이 성탄을 맞이해야 할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마굿간에 태어나신 예수님> 먼저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그 순간 세상은 어떠했습니까? 4~7절 말씀입니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우리의 왕이 이 땅에 오셨지만 머무실 곳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팍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구원자가 오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구원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이 장면은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구원자 예수님이 계시지만 그 예수님을 모셔드릴 마음의 방을 준비하지 못한 수많은 죄인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만약 중국 주석이 소주 땅에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소주시 서기랑 모든 관료들 뿐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 모든 분야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사람을 영접 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급호텔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로얄 층 전부를 비워 머물도록 할 것입니다. 권력과 힘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너무나도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의 따라 고향 땅 베들레헴에 도착하게 됩니다. 마침 마리아는 임신한 몸이었고 만삭이 되어 산기가 차 있었습니다. 근데 마침 그곳에는 호적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머물 여관 방이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마 요셉이 부하고 권세 있는 자였다면 얼마든지 방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가난한 부부였고 없는 방을 만들어 낼 힘도 없었어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이들에게 자기의 방을 내 줄 정도의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부탁을 해서 얻은 공간이 바로 마굿간이었어요. 그들은 마굿간 한 귀퉁이에 출산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냄새가 진동합니다. 너무나 비위생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산기가 다한 마리아는 그곳에서 사람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응애응애... 아이가 태어나지만 누일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 포대기로 싸서 말이 여물을 먹는 구유를 정리하여 그곳에 아이를 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장면이에요. 충격이지요. <이 장면을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참 낭만적으로 그려놓았지만 실상을 보게 되면 참으로 충격 그 자체입니다> 온 인류의 구주께서 그렇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한다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을 따라 베들레헴에 간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됩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굳이 이렇게 힘들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을까? 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나셔야만 했는가? 높은 사람의 영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보통 사람의 모습 정도는 되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주님께서 궁궐은 아닐지라도 동네병원 정도에서는 태어나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오지 않으셨어요. 주님은 기꺼이 마굿간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너무 기묘하며 신비롭습니다. 구원자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 낮아질 때 구원을 이룬다 > 무엇 때문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마굿간을 택하여 태어나신 것일까요? 그 이유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몇가지만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먼저 주님이 마굿간에서 나심은 구원은 철저히 낮은 자리로 내려올 때 이뤄짐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높은 자라도 아무리 힘 있는 자라도 아무리 많이 가진 자라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머무는 곳도 아닌 짐승이 머문 장소인 마굿간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낮은 자리로 내려와라”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들 또한 마굿간으로 달려가 그분께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더 낮고 낮은 자리로 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어서 나오지만 바로 목자가 그러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별의 음성을 듣고는 낮고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 마굿간에 머무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표징입니다.
일전에 철저한 무신론 자였다가 기독교로 귀의해 세례를 받은 이어령(79) 전장관이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몸을 맡겨본 적이 없습니다. 철저히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지요. 얼마나 외로운 삶이었는지 모릅니다. 혼자 바들바들하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내 딸도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에 귀의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나는 바울이 아닌 도마입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지식인이었어요. 그러나 도마도 물에 빠지면 허우적거리고, 철저한 절망의 궁극에 이르면 욥처럼 영성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영성과 천국이 있는 문지방에서 지금까지 전력투구한 삶과 마지막 나를 던지는 처절한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무엇이 가장 크게 변화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예로 들며 "세례받기 전까지 나는 토끼 인생이었다. 나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거북이 였어요.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큰 변화입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 여러분 이 분의 고백이 정직한 고백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가 얼마나 연약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굿간으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이룰 수 없고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나는 첫걸음입니다. <누구든지 오라!!> 또한 우리의 구주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하나님이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냥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낮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셨음에도 왕족으로 오시어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그 누가 예수님이 어려워 함부러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분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자손이셨지만 낮아질대로 낮아지셔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기꺼이 그 때를 기다리시며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삶도 참으로 무소유요 무소욕의 삶을 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자격이 필요 없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당시 소외된 여인들도,, 세리와 죄인들도 어린아이들도 다 주님께 다가가 손을 내밀면 주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어요.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용납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절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막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사는 오직 병자들에게만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낮고 천한 게 문제가 아니라 교만이 문제입니다. 가난한 자라도 교만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부자라도 교만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낮은 자라도 교만하면 문제이고, 높은 자라도 교만하면 문제입니다. 낮고 천해도 겸손히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낮고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괜찮습니다.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높고 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죄인이기에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큰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체휼을 경험하라> 세 번째로 주님이 마굿간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아픔과 고통을 체휼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곳은 가난과 궁핍 등 고난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은 극한 가난 중에 오신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를 강보로 쌌다고 했는데, 강보라는 단어는 본래 ‘찢는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는 것 같이 좋은 감이 아니고, 여기 저기 찢어진 누더기 같은 것으로 대충 감싸준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탄생 하실 때부터 가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는 헤롯의 핍박 때문에 핏덩이 같은 몸으로 애굽에 피난을 갑니다. 그리고 33년의 지상 생애 내내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굶주림, 목마름, 고독, 슬픔, 멸시, 천대, 핍박, ... 그리고 급기야는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셨고, 무덤에 장사되는 경험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아픔들을 다 겪으셨습니다. 단 한 가지, 범죄의 경험만 없으실 뿐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동정’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몸소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무엇이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받고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받으려면 ‘공감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다르므로 예수님이 신성으로만 우리를 도와주시면 뭔가 허전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모든 인생고를 몸소 겪어 보시고 우리를 도와주니까 우리에게 큰 감격이 되는 겁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이 공감의 시작입니다..
일전에 제가 인용한 예화가 있습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 1권을 보면 ‘아빠의 눈물’이란 글이 나옵니다. 어느 가족의 이야기인데, 온 가족이 휴가를 다녀오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중3 딸아이가 크게 다쳐 목발을 집게 됩니다. 아빠도 목발을 짚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가족들은 경상으로 금세 회복됩니다. 한참 예민한 청소년기에 딸아이는 방황합니다. 그럴 때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항심이 생깁니다. 심지어 엄마의 말조차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처지인 아빠의 위로는 큰 힘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 4년 후 대학에 합격해서 입학하는 날 온 가족이 입학식을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캠퍼스를 빠져나오는데, 어린 아이가 놀다가 한길로 뛰어나옵니다. 자동차가 달려와서 위험한 순간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목발을 던져두고 달려가 아이를 구해냅니다. 딸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아빠가?” 나중에 알게 된 시연인즉슨 아빠가 청소년기의 딸아이에게 위로가 되려고 다치지 않은 발을 저는 척하며 목발을 짚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빠의 사랑은 딸에게 더 큰 감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공감이요 체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난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또 요1:14에 보면, 사도 요한이 성탄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장막(Tent)를 치고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함께 살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종류의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 현장에 와 계십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처럼 모든 고난의 경험을 해 보셨기에,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동정해 주시고, 또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십니다. 제가 7년 전 암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을 때 그것을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였을 때에는 사람의 도움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겪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만이 나의 힘이 되어주셨어요..
부디 이 성탄절기에 주님이 나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새 힘과 새 용기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축원드립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