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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 백승엽 201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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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7~40절 부활 신앙

 

<내세에 대한 신앙>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이 궁금한 것이고 또한 관심을 가지는 영역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이집트에 가보면 인류문명의 4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피라밋이 있습니다. 이 피라밋은 당대 왕들의 묘실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웅장한지 높이가 140m나 되고 3만개의 엄청난 돌로 이뤄져 있는 것도 있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보지 않고 영혼이 영원히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라밋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지어서 거기에 시체를 모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왕들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돈을 버는 목적이 그들의 묘실을 준비하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처럼 서민들도 그들의 묘실을 견고한 집으로 지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가 돈을 가득히 넣어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강을 건너가는데 뱃사공에게 배 삯이라도 주라는 뜻에서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위와 비슷한 풍습이 있습니다. 풍수지리를 믿는 일부 사람들은 명당자리를 찾아서 온 산을 헤매며 죽을 묘자리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자리에 죽은 자를 장사하면 그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라마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죽은 자의 입에다가 돈을 물려 주면서 저 세상에 가서 편히 잘 살게나하는 그러한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될 것인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모든 이의 관심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다음의 세상이 있는가? 만약 그 다음 세상이 있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질문을 한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를 놓고 볼 때... “죽고 나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야!!” 그 생각이 막연합니다. 그들의 추측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지요. 질문은 던지지만 명확한 답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말미암고 어디로 돌아가게 될 것인가? 인생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기독교는 불명확한 종교가 아니라 명확한 종교입니다. 애매하게 혼란만 주는 종교가 아니라 확신을 주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우리가 부활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죽음이 어디서 왔는가? 그것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죽음을 논해야 부활을 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죽음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여타 그 어떤 종교도 죽음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의 원죄를 함께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런데 우리가 죽을 운명으로 인생이 끝나고 마는가? 아닙니다. 인생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 확실한 증거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부활을 수많은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고, 입으셨던 옷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죽으신 모습 그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살아생전 내가 너희를 위해 고난을 받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신대로 친히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무덤 앞에 슬퍼하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천사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24:5,6) 할렐루야..

 

그런데 예수님이 이 부활이 오늘날 우리의 부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전1513절 하반부에..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고 20절에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고전15:20]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치면 심장과 같은 것이에요.. 이 부활신앙이 우리를 살게 하고 가슴을 요동케 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셨던 월남 이상재 장로님께 한 번은 일본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하였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이십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장로님은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속에 이땅의 삶은 잠시 뿐이요 하나님과 영원히 사실 것에 대한 부활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그러면 본문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 부류가 나타납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일전에 갤럽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8%이고,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8%밖에 안되었다고 그럽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더 크게 성공할 것인가? 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노후를 더 잘 준비할 것인가? 이런 현세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지.. 내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거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내가 죽어서 어디에 갈 것인가?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홀연히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 서서 그때 내 인생의 운명을 돌아보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지금 건강하다 평안하다 생각 될 때에.. 인생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다음 세상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인들도 일반적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현실주의자며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현실의 더 나은 삶을 추구했고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많이 가지지만..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려 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 계대 결혼에 대한 이야기 >

이들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전재를 깔고 예수님께 나아와 이야기를 하나 꺼집어 냅니다.. 무슨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어느 집에 형제 일곱이 있는데 큰 형이 결혼만 하고 자식이 없이 죽었어요.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와 결혼했는데 이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었어요. 셋째도 그 형수와 결혼을 했는데 그도 죽었어요.. 넷째도 다섯째도 일곱째까지 차례로 첫 번째 형수와 결혼을 해서 살았는데 모두 죽은 거여요.. 그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 비꼬면서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나중에 부활하게 되면 이 여인은 그러면 누구의 부인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풍습을 계대결혼이라 그러는데 가족가운데 형이 결혼해서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을 해 가지고 자식을 낳게하는 그런 풍습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라졌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자손번식을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된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두개인이 이 이야기를 꺼집어 내면서 부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잘못된 오해>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만약 부활이 있다면 우스운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일곱명의 형제가 모두가 부활하면 그 부인은 누구의 소유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공동소유가 된다고 그러면 너무 우스운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두개인의 질문 속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들 가운데서도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부활을 해도 우리가 똑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의 상황이 그대로 연장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병든 채 죽었다가 살아나면 병든 채 살아간다고 보고, 늙은 채 죽었다가 부활하면 늙은 채 살아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우스운 일이 발생합니다. 목이 베어 순교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목하나 들고 다니며 살아가야 된다는 그런 설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두개인들은 한 아내가 7명의 형제와 결혼을 했으니.. 천국에 가도 그들과 똑같은 관계 가운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활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새롭고 놀라운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 죽을 때의 모습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운 창조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4~36절 말씀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우리가 부활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활은 죽을 때의 상태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육적인 몸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우리의 이 육적인 몸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알의 씨앗이 그냥 있으면 하나의 씨앗이지만 이 씨앗이 땅에 심겨져 죽고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전의 씨앗의 모습이 아니라.. 놀라운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로 배나무로 자라나게 됩니다.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 있습니까? 절대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몸이 아무리 쭈굴쭈굴해도 쭈굴쭈굴한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 쩔뚝거리는 다리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키작은 사람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그날이 되면 절대 키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되어 환상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점 있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고민하지 마십시오..우리가 육체를 벗고 부활의 몸이 되면 점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부활을 설명할 때 쉽게 잘 묘사한 자연현상이 바로 애벌레의 변화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벌레는 그냥 보기에 꿈틀대는 하나의 곤충에 불과하지만 이 애벌레가 나중에 자라게 되면 번데기가 됩니다. 번데기가 되면 마치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것이 살아나는데 이번에 살아날 때는 다시 애벌레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몸은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인데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때는 지금 우리의 몸과 재질도 다르고 모습도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부활의 때는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아니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인류를 번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런 과정이 필요 없어집니다. 부부의 관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의 구별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초월적인 사랑,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지도 않기 때문에 병들거나 늙지도 않습니다. 천사와 동등되다 했으니.. 천사처럼 영화로운 형상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빛을 발할 것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며 그 모습을 잠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하게 되면 그런 영화로운 모습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가 너무 많이 변하면 서로 알아보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때는 우리의 지각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의 몸이 될 때 구원받은 모든 백성을 한 눈에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부활의 순간 그 자리에 그 장소에서 뵐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누가 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부활에 누가 참여할 수 있습니까? 35절 말씀 앞부분을 보게 되면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26)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모셔들일 때 우리는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부활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접지 않는 자는 결코 부활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부활하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붙은 모든 자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첫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1) 할렐루야!!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어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장면을 하나 인용하시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론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37~38절입니다.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가시나무 떨기에서 모세를 만나는 이야기를 꺼집어 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소개하십니다. 이 모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죠? 그들 각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하나님이 한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면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때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는 영원히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당신을 소개하시기를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다고 여깁니다. 모세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죽은 지 500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앞에 두고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하나님께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죽었으나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으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육신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죽음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 있으며 예수님을 믿게 되면 비록 육신이 한번 죽지만 그는 영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재림의 때에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상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말씀하신 영생이라는 의미가 바로 여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육신은 한번 정해진 대로 죽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순간부터 우리의 영이 살아 부활하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할렐루야

[3: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할렐루야

아들을 믿으면 영생이 이미 있으므로 살아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지만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부활은 믿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것에 큰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세상에 그렇게 집착합니까? 이 세상 삶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 삶에 그렇게 집착이 많습니다. 죽기 전에 누려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국 우리는 부활 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큰 미련이 없습니다. 도리어 부활하고 난 다음의 일을 준비할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 본향을 바라며 사는 것이 부활을 믿는 우리의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죽어도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쿼바디스 같은 영화를 보면 불시험 앞에도 그들은 찬송하며 주님을 섬깁니다. 맹수의 밥이 되는 곳에서도 그들은 담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이며 이게 곧 육신을 벗고 영광의 주님을 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장 생활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죽고 싶은 고통을 만나고 계십니까? 지금 주님을 섬기면서 당하는 어려움은 부활의 날에는 자랑거리가 될 것이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신앙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오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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