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가족 | 운영자 | 2012-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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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31절~35절 영적 가족 후배하나가 계속 결혼이 미뤄지는 것을 보고 선배가 말을 합니다. 너 왜 그래, 눈이 너무 높은 것 아니야!! 후배가 “아니에요 이 사람이다 싶어 데리고 가면 엄마가 이래서 반대 저래서 반대 자꾸 퇴짜를 맞아요” 선배가 “그러면 아예 엄마를 쏙 닮은 사람을 데리고 가보지 그래” 그러자 후배가 “그러면 이번에는 아빠가 극구 반대를 해요” 하하 가정은 행복의 산실이기도 하지만 갈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가족간에도 서로 마음과 뜻이 맞지 않아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는 한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본문> 한번은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밖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전갈을 받은 예수님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그리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이니라”하셨습니다. 그 말만 언뜻 보면 예수님은 혈육의 관계에 대해 냉담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결코 예수님은 혈육의 관계에 대해 무시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의 뜻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새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가족이 잇습니다. 바로 여기 있는 성도들이지요. 이 가족은 독특합니다. 주일마다 만납니다. 주중에도 수시로 수시로 만납니다. 새벽마다 만나기도 합니다. 한 교회에서 같이 살면서 함께 늙어갑니다. 육신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 가족이지요. 나이 먹어 서울로 부산으로 지방으로 중국으로 떨어져 살면 명절에 한번 볼까말까 합니다. 부모님 초상 나면 한번 모일까 늘 풀풀이 흩흐져서 삽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가족은 오랫동안 아니 평생을 함께 하면서 나그네 길을 함께 걸어 갑니다. 아니 이 세상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함께 삽니다. 육신의 가족은 그러지 못하죠.. 우리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관계를 끝이 나지만.. 영적인 가족은 천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함께 삽니다. 세상에 이런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가족 속에서 서로서로 관계를 잘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영적인 가족과 사는 것이 왜 복이냐? ▷ 첫째는 인생의 짐을 함께 지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맑은 날도 있지만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영적인 가족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함께 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예일대 박사과정 재학중인 어떤 학생이 ‘고속버스 승객 가운데 나타나는 비사회적 행동’에 대해 논물을 적었다.. 장거리 버스를 타고가는 승객의 심리적 현상이 다 비슷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을 못 앉게 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방을 놓아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늘어지게 발을 펴서 잠자는 시늉을 하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도 쪽에 앉아서 아이폰에 열중하는 척 하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멍하니 창문을 보며 정신나간 사람 시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그 가운데 여러분도 한번 해 보셨죠? 어쩔 수 없이 버스가 꽉 찾을 경우 자리를 옆에 앉아야 될 때 기피 순위가 있다고 합니다. 기피 1순위 정신 이상자. 그 다음 뚱뚱한 자. 그 다음은 지저분한 자. 그 다음은 수다장이.. 어떻게 해든 옆자리에 못 앉도록 합니다. 그것이 어디 고속버스 안에서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삶이 다 그렇지요.. 사람들은 내 곁을 잘 안 내 주려고 합니다. 직장에서 동료들을 만나면 허허 그리며 살지만 그것은 겉으로 그러는 것이고 속을 들여다보면 내 곁을 잘 내 주지 않으려 합니다. 서로가 그러고 사니까 사실은 외롭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가족이 중요한 것입니다. ▷ 어떤 비행 청소년이 이런 애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서 무조건 반항을 하고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허전 했답니다. 중3때 담임선생님이 자신에게 잘 해 주셨지만 그래도 계속 말썽을 피웠답니다. 한번은 방과 후에 패싸움을 해서 머리가 터져 왔는데 선생님이 붕대를 감아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상호” 피를 많이 흘렸네. 어떡하지!! 그냥 상호가 아니라 우리 상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 그냥 상호가 아니라 “우리 상호”라는 말이 그 가슴을 때렸답니다. ‘우리 상호’라는 말이 너무나 따뜻해서.. 아 내가 이렇게 살 수 없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가족은 다 우리입니다. 우리 성도님, 우리 집사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그 몸에 붙은 지체입니다. 고전 12:26절에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지체는 기쁨도 함께하고 슬픔도 함께하는 관계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손가락이 아리면 손가락만 아픕니까? 온몸이 아리고 아프지 않습니까? 축구 선수가 슛 골인을 하면 발만 기뻐합니까? 온 몸이 기뻐하지 않습니까? 지체는 기쁨도 같이 나누고 슬픔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인 가족은 그런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 때도 함께 울고 웃을 때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은 “누가 내 곁에 오나”하면서 아무도 못오도록 바리케이트를 치고 그러지 않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달려가서 함께 웁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구 목사님, 말씀은 좋지만 실제로 현실을 보면 어떤 사람은 가까이 하기가 힘들어요. 솔직히 성격도 괘팍하고 사는 것도 이상하게 정상이 아닌 것 같고.. 참 감싸주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여러분, 고전 12장 22절을 보면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약하고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일수록 더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까? 교회는 어차피 약한 자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로 온갖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 교회도 당연히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어떤 상하고 찣긴 사람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 필립얀시의 책을 보면 이런 애기가 나옵니다. 마약 중독에다 하루하루 몸을 팔아 사는 창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 창녀가 자기의 어린 딸에게도 자기와 똑같은 일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마약 살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알고는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도움을 한번 청해보지 그래요.”. 그랬습니다. 그 창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뭔지 아십니까? “교회요!! 거긴 왜 가요? 안 그래도 비참해 죽겠는데.. 거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여요” 충격적인 말이지요.. 비참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곳이라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간판은 걸어 놓았을지 몰라도.. 거기에는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교회는 싸메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피난처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상하고 찟긴 자라고 하더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곳, 치료받을 수 있는 곳, 새로워 질 수 있는 곳 희망의 끈을 붇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 웨슬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웨슬리 어머니에게 19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자녀가 있는 어머니가 자녀들의 이름이라도 다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 기자가 그 어머니께 물어보았습니다. “그 많은 자녀들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합니까?”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내 자녀들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요? 병든 자녀가 나을 때 까지는 그 자녀를 사랑하고 집나간 자녀가 돌아올 때 까지는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그게 어머니죠? 교회는 그런 어머니 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인생의 바리케이트를 다 내려놓고..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은혜의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영국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어렵게 목회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런던에 사는 어떤 장로님이 우연히 시골교회 예배를 참석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분이 런던에 있는 본인 교회로 목사님을 초청했는데 그곳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마침 그 교회 담임목사님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모든 성도들이 만장일치로 이 목사님을 모시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목사님도 흔쾌히 승낙을 한 것이지요. 이제 대 도시에서 내 목회 비전을 마음껏 펼쳐 보겠다는 기대감도 부풀었습니다. 그동안 아내를 고생 시켰는데 이제 좀 덜어주게 되었구나 그런 마음도 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짐을 꾸리고 이사를 가기로 한 어느 날 갑자기 울음소리가 바깥에서 들립니다. 20~30명 밖에 되지 않는 그 교회 성도들이 문자락을 잡고, 혹은 선채로 부모 잃은 고아처럼 울고 있습니다. 마냥 서서 훌쩍훌쩍 기도를 하며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겁니다. 그 장면을 본 목사님 내외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서 짐을 다시 풀었습니다. 다시 주저 앉은 것입니다. 그날 밤 이 목사님이 혼자서 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한 선율이 떠 올랐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 악보 준비 - 피차의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찬송가 221장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세상의 좀 더 나은 삶 안락한 삶 그런 것으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가 바로 영적인 관계입니다. 우리 은혜의 교회는 그런 천국의 교제로 충만한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 둘째로 왜 영적인 가족 두셨는가? 영적으로 서로 성숙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가족 속에 두신 이유가 바로 이 성숙을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성숙이라는 것은 절대로 내 혼자서는 터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혼자서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대상이 없는데.. 긍휼을 혼자 터득 할 수 있겠습니까? 희생이라든지 용서라든지.. 이런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은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구를 대하든지 그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한 두가지 배울 것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지식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몸으로 떼우는 봉사 만큼은 참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은 함부러 하는 것 같은데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인 모습 속에서 반면교사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 목장에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도는 참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성도입니다. 삐딱하게 말하고 분위기를 흐트립니다. 그래서 설교 테이프도 사주고 신앙서적도 사주고 했는데 도통 변할 줄 모릅니다. 어느 날 목자가 너무 답답해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 사람 왜 저래요.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아요.. 도무지 변할 줄 몰라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답답하지.. 네 말을 못 알아듣는 저 사람 보니까 참 답답하지? 그런데 너는 어떻니? 너는 말을 잘 듣니? 너는 내 말에 잘 순종하니?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 치자 너는 신앙생활 한지 오래 되었고,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니?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답답하다” 이 사람이 이 생각이 드니까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눈물콧물 흘리면서. “하나님 그렇군요.. 제가 잘못되었군요. 약한 사람 판단했던 제가 잘못되었군요.. 남의 티는 볼 줄 알면서 저의 들보는 하나도 보지 못했군요” 그날 얼마나 회개를 했는지요. 그리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봐도 마음 속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참아주고 이해가 되더랍니다. 누가 그 사람을 비판해도 자신이 이해해 주고 그의 편이 되어 주었어요.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그 교만을 깨닫게 되었어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자신이 변하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도 변화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서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잠언 27장 17절에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사람이 서로서로를 빛나게 할 수 있다.. 서로에게서 배우려고 할 때 서로서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빛내 주면서 함께 성숙해 나갈 수 있는 것. 그게 얼마나 복인 줄 모릅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에 새가족이 왔는데 확신반을 처음 시작하려니.. 혼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서먹할까 싶어서 함께 참석해 주려고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자신은 이미 그 과정을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짐을 져 줄 수 있는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몰라요.. 나의 수고가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가장 중요한 일 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어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서로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므로 성숙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영적 가족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동거동락 하는 데만 머물지 않습니다.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앙 안에서 함께 동역합니다. 선교지인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이 지역사회를 향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중국 곳곳으로 또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체육대회가 있고 이번 주에는 바자회가 있습니다. 체육대회를 통해서는 성도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자회를 통해서는 이 땅을 향한 사명을 감당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팔고 이윤을 남기는 그런 행사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지역주민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교회는 선교지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주에 선교사님이 오셔서 귀한 말씀과 더불어 간증을 들었지만.. 우리가 말씀한번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단순히 후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역하며.. 우리들도 할 수 있으면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보며 땀도 흘리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기를 좋은 교회는 좋은 추억이 많은 교회다!!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교회입니다. 제가 말하는 좋은 추억이란 단순히 놀고먹는 그런 추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추억.. 함께 땀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추억.. 그런 추억이 많을 수 있다면 그것이 참으로 좋은 교회가 아닐까요? 이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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