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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운영자 201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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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41~ 48절 예수님의 눈물(2012.9.16.설교)

 

제가 1997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이스라엘에서 9개월 가량을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곳에 친구가 아는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그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에 정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근교에서 4개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5개월을 지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순간순간이 좋았고, 꿈만 갔았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크게 고 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현대 예루살렘으로 나눠집니다. 옛날 예수님이 머물 당시 예루살렘 성은 유적지로 남겨져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아닌 근교에서 도시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의 그 유적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숨결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항상 수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립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 그리고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단순히 사람이 사는 하나의 성으로 여겨졌다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 역사 속의 예루살렘 >

역사 속에 이 예루살렘은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선왕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위를 얻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다스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면서 부터 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하고는 그 근교에 다윗성을 지어 본인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하셨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예루살렘이 의미 있는 것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였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성전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중심의 생활을 했고 이 성전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 전국 방방곳곳으로 떨어져 살았지만 일년에 세차례, 적어도 한차례(유월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와 모든 백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인해 한 차례 파괴가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곳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데,, 페르시아왕 고래스가 통치할 때 다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성전이 예수님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분위기를 좀 알고 예루살렘을 바라봐야 우리가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편합니다.

 

<예수님의 눈물>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매우 슬픈 한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이 머물고 있는 이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눈물 샘을 자극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공사역 가운데 눈물을 흘리신 기사가 두번 나오는데 그 장면을 살펴보면 그냥 우연히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라 구속사에 중요한 한 시점에 흘리신 눈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1132~35절에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며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떤 아픔을 당하였든지,, 주님은 그 아픔을 공감하시며 함께 짊어지기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흘리신 눈물이 있습니다.

41절 말씀이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오늘날 예루살렘에 가 보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기드론 골자기에 교회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교회가 눈물교회입니다. 탑을 마치 눈물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이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우셨을까요?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사람이 죽어 슬퍼 울 수도 있고, 나 자신에 절망해서 울 수도 있고, 실패해서 울 수도 있고, 너무 기쁜 나머지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셔야 할 너무나 중요한 시점에.. 당신의 몸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줘야 할 이 중요한 때에.. 당신이 들어가려고 하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정황을 보아, 주님은 죽음이 두려워 우신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우신 것이 아니라,그것은 분명 예루살렘을 위해,, 그곳에 머문 자기 백성을 위해 우신 것이 분명합니다..

 

원어를 보게 되면 이 우신 것이 그냥 운 것이 아니라.. ‘흐느껴 울다’ ‘울부짖다’ ‘ 통곡하다는 매우 강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가 흐느껴 울부짖은것입니다. 주님이 왜 흐느껴 우셨을까요? 주님이 그렇게 우신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을 바라보니 너무 슬프셨기 때문입니다. 그 건물을 바라 본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백성을 바라보니..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이 우신 몇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늘날 영적 예루살렘으로 여겨지는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기 원합니다.

1. 영접지 않는 사람들

먼저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예수님을 영접지 않는 백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9~1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의 빛이셨고 이미 세상에 계셨고 세상을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땅에 와도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듣고 예배하고 함에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영접지 않은 백성들을 바라보실 때 너무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백성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저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완전 이방인 취급받는 갈릴리 같은 곳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여리고 같은 곳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는커녕.. 호시탐탐... 예수님께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분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47절에 봐도 그 장면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왜 그럴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출세와 세상의 영화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권력을 다 빼앗길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적 배경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빼앗기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너무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이 부유하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을 다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빼앗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 아십시오.. 그것은 부요한 마음에 비롯되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재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전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영원한 가치에 쓸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속한 영혼들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부요했고 너무 교만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였고.. 예수님이 내게로 와서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을 때..그들은 주님께로 담대히 달려 나갔고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나의 기득권이, 나의 배경이, 나의 환경이 주님께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까? 혹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걸림돌은 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 다시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축복을 지켜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축복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시며 오늘도 눈물 흘리십니다..

 

2. 형식적인 신앙생활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이 우신 것은 당시 종교인들의 형식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얼마나 종교적인 도시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유대정통 랍비들만 모여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정통의복을 입고 다녀야 하고 항상 율법을 소지하고 다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종교적인 신분의 사람인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인구가 전체의 10%는 족히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은 6천명이 넘었고 추종자까지 2500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기관 및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이었으며 정치와 밀접하게 결탁된 계급으로 그 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백에서 수천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의 신앙을 실랄하게 비판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표현으로 마태복음 23장에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신앙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분명 겉으로 보면 종교적인 색깔을 뜁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얼마나 썩고 부패해 있는지 모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나태내지 못하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없고 그런 열정이 사라지게 된..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특별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기독교 역사가 130여년이 흘렀습니다. 복음의 세대가 몇세대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곳곳에서 예수믿는 사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모든 분야에서 그 이름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히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목에 힘주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출세를 위한 방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이름을 내는 곳이 아닙니다. 거저 자신이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낮은 자세로 섬기는 곳이지요.. 세상 속에 누룩처럼 소리없이 들어가 세상을 치유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욕을 얻어 먹는지 모릅니다.

 

돈 문제 때문에 세상 법정에 서지를 않나. 거룩한 성전에서 폭력이 난무하질 안나.. 상호 비방과 음해로 둘로 나뉘질 않나...이런 소식을 들을 때 너무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울고 계시는 거여요..

 

여러분 교회는 사람이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만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 한분 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의 탈을 벗어버리고 예배의 영광을 회복해야하고, 기도의 능력을 되찾아야 하고,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타락한 예배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 주님이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바로 당시 예루살렘에 행해졌던 타락한 예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도시 였습니다. 매주 안식일에 예배와 더불어 말씀이 선포되었고, 일년에 적어도 한차례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성대하게 드려졌던 곳입니다.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이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며 그들의 신앙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가 형식적으로 흘렀을 뿐 아니라 예배 자체가 타락한 예배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게 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신 장면을 수차례 목격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마다 주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21: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오늘 본문을 봐도 비슷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45,46“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또 다른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그들을 다 몰아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번 그렇게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갈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러한 분위기였고 그런 관습에 젖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신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화를 내시는 유일한 장면이 바로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타락하고 가볍게 여겨질 때.. 거기에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님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각 나라 각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뵙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왔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명절의 흥을 즐기기 위해 왔을 것입니다.

어떻게 왔던 모여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최상의 예배를 준비하고 최상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봉사자들은 그들에게 최상의 은혜가 임하도록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배를 드려야 할 성전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온갖 물건들을 팝니다. 환전을 합니다. 비둘기를 팝니다. 아마 각종 가축을 파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성전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요.. 성전이 마치 도때기 시장 분위기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시끄러운 것이야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성전 앞에서 이뤄지는 이 장면은 당시 예배에 대한 규례를 보면 얼마나 바르지 못한 모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철저히 준비를 하고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흠없고 점없는 짐승을 미리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 또한 미리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기도로 준비합니다.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성전에 와서 급조하거나 준비 안 된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예배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런 모습이 허다했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왔다가 예배는 드려야 겠기에 성전 앞에 파는 비둘기 하나 사가지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갑니다. 준비해 온 재물에 변심하면 성전 앞에서 돈을 잔돈으로 바꾸어 그것만 바치고 갑니다. 다른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온 사람들도 문제가 있지만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장사진을 치고 이러고 있어니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 분위기에 물들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린다면 그 신앙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무너지고 넘어졌어도 예배 한번 잘 드리게 되면 다시 소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자빠졌더라도 예배한번 제대로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잘나가고 세상에서 성공했더라도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예배가 타락해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 보세요. 사울 왕이 베냐민지파로 지극히 작은 지파에서 큰 은혜를 입어 전 이스라엘 지파의 초대 왕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진짜 성공한 왕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게 됩니다.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가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쳐들어 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보통사람 같아서도 마음이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전쟁에 이 방법을 순종했기 때문에 그가 치러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은 이 방법을 무시해 버립니다. 블레셋 군대가 기세를 올리자 이스라엘 군사들이 무서워하고 일부는 도망하고 숨고.. 점점 조급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조급해도 아무리 위급해도 정도를 가야 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울은 백성들이 요동하자 전쟁을 치러기 위해.. 자기가 제사를 치러버립니다. 당시 제사는 제사장만이 집도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맙니다.. 예수님을 지금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교회관>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한편으로 잘못된 교회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전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가져오는 놀라운 장소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가볍게 여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그 잘못된 믿음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멸로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 보시며 우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이며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이 있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이곳이 얼마나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과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Now &Here)”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그러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린 성전.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성전은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사람은 교회를 스타박스 커피숍처럼 생각합니다. 주일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 좋은 말씀 듣고 교제 나누다가 헤어지는 다음에 또 만나고 싶으면 나와 먹고 교제하다가 또 헤어지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스타박스 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스타박스와 여러분과의 관계 밖에 되지 않는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회를 내 생명처럼 여겨야, 내 생명처럼 아껴야 하고, 내 생명처럼 헌신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의 가득한 보화를 교회를 통해 여러분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복받기를 바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통해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결론> 오늘날 예수님의 눈물을 바로 교회를 향한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눈물입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이 있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먼저 믿은 우리들이라면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예배를 다시 회복하여..이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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