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 운영자 | 2012-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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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28절~40절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였습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던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산소망을 가지게 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들, 사회문제들 이런 것들을 보면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악해지면 얼마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는지요? 4살짜리 7살짜리 아이를 성폭행 하고 내버리질 않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상해하고 죽이지를 않나.. 이런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해서 짐승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짐승도 감성이 있고 부정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에 사로잡히게 되면... 완전히 마귀가 되는 거여요.. 실제로 아주 나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정신적으로 이상한 그런 자가 대부분이라고 하쟎아요.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뭔가 또 다른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될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교육을 한다고 그것이 됩니까? 사회에서 격리한다고 그것을 예방할 수 있나요? 경찰을 많이 뽑아서 방범을 강화하면 그런 문제가 해결되나요? 사람의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자를 그러한 상태에서 구원하지 않는 이상 그런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앞으로 우리 세대가 어떻게 될지 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떤 사회에 노출되어 살게 될지 고민해야 합니다. 돈이 없어 자식이 이상한 길로 빠지는게 아닙니다. 못 배워서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요. 저희 교회 건물에 입시학원이 3개나 있습니다. 수시로 학생들이 드나듭니다. 대부분 국제학교 한국학교 다니는 애들이에요. 다 가진 애들입니다. 그런데 애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욕을 하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아요.. 요즘 애들이 이렇습니다..(물론 은혜의 교회 애들은 그렇게 되면 안되지만...) 사회에 무슨 불만이 많아서 그러는지.. 이 사회가 이토록 병들었다는 반증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정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류는 다시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는 새로워질 수 있고,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눅4장18절~19절을 보면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오늘날 이런 복음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때인가요?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 가시는 예수님> 28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8절입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수님은 공사역을 마감할 시점이 되셨습니다. 마지막 1주일을 남겨두셨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인생이 마지막 일주일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까지 하신 모든 일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행하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러한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명예와 성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왕이 되실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왕과 대제사장,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기에 묵묵히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친히 자발적으로 먼저... 본이 되시며 나아가시는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적용> 우리 주님은 어떻게 죽으실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고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될 것임을 3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내딛으십니다. 사람을 멋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오지만 주님은 그 발걸음에 비장한 각오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이런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장애가 없지 않습니다. 분명히 어떤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친구는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는 그 시점에 아버님께 그 사실이 발각이 되어 다리몽둥이 부러질 정도로 매를 맞았어요.. 그러면 무서워 교회를 안나와 하쟎아요.. 그런데도 몰래 또 교회에 나오는 거여요.. ‘예수가 무엇이길래~’ 이 예수님을 믿으면 직장에서. 사회에서 불이익이 닥쳐올 수도 있어요.. 거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영업하는데 불편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 발걸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고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나귀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마을인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어떻게 입성을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몇 번은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나귀새끼를 타시고는 예루살렘 성을 향해 들어가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왜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나귀새끼를 타셨을까요? 바로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스가랴 9:9절 말씀에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할렐루야!! 우리에게 임하신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그것도 새끼나귀를 타셨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는 이로 하여금 “이분이 바로 구약에 약속하신 바로 오실 메시야이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셔야 하는 구원자이시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배운 자라면. 스가랴가 예언한 오셔야 할 왕.. 그분이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올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그렇게 배우고 연구한 학자들도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그분이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새끼나귀를 타신 어른의 모습...(그림)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몇십분이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이 그랬을까요? 멋진 말을 탈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수례를 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그 모습을 보며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아는 자들이 깨달으라고.. 시간을 주는 거여요..(그림 감춤) 여러분, 교회 나와서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들으며.. 깨달으셔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지식으로 알면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주님을 영접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겸손을 보이신 주님> 또 하나는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이 장면 속에 우리는 주님의 겸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사람들 앞에 다가갈 정도로 겸손하셨습니다. 주님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천군천사와 함께 위엄가운데 예루살렘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에 그런 힘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말씀에서와 같이 새끼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으로 한명이라도 더 주님과 스킨쉽을 하게 하셨고, 주님의 손을 잡게 하셨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만약 큰 나귀나, 말, 수례 이런 것을 타셨다면.. 사람들에게 위엄스럽게 보였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한 영혼이라도 더 만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새끼나귀를 타시며 낮아지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겸손이 있기에, 오늘도 그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손을 붙들면 주님은 그를 만나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순종> 이런 계획을 가지시고 제자 두사람에게 나귀를 데려오라고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는데 제자들의 태도와 그 결과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교훈을 또한 깨달을 수 있습니다. 30절로 31절을 읽어보면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어떻게 잘못 읽게 되면 주님은 완전 폭군 아닌가? 조직폭력배도 아니고 남의 집에 들어가 나귀새끼 있거든 보고 끌고 오라!! 누가 말하면 우리 보스가 쓰시겠다고 그러시네.. 대답하라...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해석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순종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의 죽음을 아실 뿐 아니라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살고 죽는 운명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나귀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아셨고,, 그 주인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절대 주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보면.. 참 아름답고 귀하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두 제자와 나귀의 주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웃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 그랬을 때 제자들은 32절에 아무런 의심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마을로 갑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진짜 아무도 타본 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만났습니다. 그것을 끌어가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놀라며 ‘어찌하여 내 나귀를 풀어가느냐?’ 제자들에게 반문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러주신 말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말해 줍니다.. 그러자 이 주인은 두말하지 않고 자기의 나귀새끼를 보내줍니다.. 이 장면을 보면.. 주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 나귀새끼를 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내어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한두번 정도 의심해 보고 순종하든지, 한 두번 반항해 보고 순종하든지 그럴건데 여기에 나오는 제자나 주인이나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바라보며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 ‘참 귀한 마음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이해가 다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예비해 두셨다고 말씀하였으면 믿음으로 가 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는 가운데 마게도냐(오늘날 그리스)사람이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바울을 부릅니다. 사실 바울은 아시아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돌봐야 할 일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땅으로 와 달라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을 때 그는 순종하였어요. 그랬더니. 가는 곳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 도착한 곳이 빌립보인데 그곳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납니다. 하나님이 다 예배해 두신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브리스기랄와 아굴라 같은 동역자를 만납니다. 유럽선교의 문을 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할 때 예비해 두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적용>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은혜를 경험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일 일을 예측 할래야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이 예측만 잘해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일도 모르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는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예측하시고 닥쳐오는 당신의 운명을 아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아멘~ 특별히 모든 것을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방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면 안전한 길을 갈 수 있는지 나침반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제자처럼 이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 또한 우리가 제자의 말에 대한 나귀 주인의 반응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같이 33,34절 말씀을 읽어보면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제자가 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그러니 이 주인이 두말하지 않고 그 새끼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야!! 진짜 좋은 믿음이다.. 이런 생각이 안 듭니까? 당시 나귀는 옛날 송아지와 같아요. 식민 지배 속에 짐승을 길러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것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주님 한 마디에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선 듯 그것을 내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마음이 바로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막달라 마리아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리아는 1년 동안 모아놓은 자신의 재산으로 산 옥합을 주님의 장사를 위해 기꺼이 주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위해 주었으면 좋았겠다.. 그러지만 그것은 믿음없는 자의 고백이에요. 가난한 자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만..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늘에서도 기억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예수님을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때와 그 시기는 항상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귀의 주인이 주님께 자신의 나귀를 드릴 수 있는 때는 바로 그때 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주님의 발이 되어 줄 수 있는 그 소중한 시기를 그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지요. 만약 그가 그 시기를 놓쳐버렸다면 그는 평생 주님을 다시 섬길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은혜의 성도 여러분,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기꺼이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가 이 건물 3층 1/3 가량을 쓰고 있는데 여전히 모임이나 식사 장소가 넓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식사장소로 자신의 사무실을 개방하고 교제의 장소로 제공하고 어떤 분은 성경공부 장소로 재공하고 하는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저희 교회가 차량이 없는데 어떤 분은 필요할 때 차량을 쓰라고 내어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그 마음도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 그것 뿐인가요?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얼마나 많나요? 여러분의 가진 재능을 쓰시겠다고 하실 때 그것을 내어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열심을 다해서 벌어들였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하나님께 받아 관리하는 청지기 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것을 내어놓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요? 저는 은혜의 모든 지체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시간이 있을 때,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쁘게 아멘함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인이 예수님께 나귀를 내어 들였을 때 이 나귀가 얼마나 귀하게 쓰여졌나요? 예수님은 이 나귀를 타시고 유유히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비록 나귀 새끼지만 이 새끼나귀는 말씀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고 예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자 그러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군중들이 열렬한 환호가 시작됩니다. 37~38절 말씀입니다.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매우 의외의 반응이 나옵니다. 주님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외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조차도 허락하심을 보게 됩니다. 바로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잠시 동안은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겠지만 죽은 이후 3일 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부활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에 억눌린 모든 자를 자유케 하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미리 기뻐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높이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날이 되면 반드시 예수님이 천군천사와 함께 이땅에 다시 오셔서 마귀와 그를 따르던 자를 사로 잡아 무저갱이에 가두시고 모든 무릎을 그 발아래 꿇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에게 그런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의 그 완전한 통치를 바라보며 오늘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늘 나의 왕되심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 나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존재가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기뻐 환호하는데 주변에 있는 형식적 종교인인 바리새인은 그 장면을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39, 40절입니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역사하심에 침묵하지 마십시오. 즐거워 하고 환호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구원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믿는 것만큼 여러분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그런데 왜 잠잠합니까? 만약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럽니다. 성도가 잠잠하면 세상이 소리지럽니다. 세상이 자꾸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사고, 자연재앙, 전쟁과 기근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여러분, 우리가 외치면 세상이 주님을 볼 것입니다.. 이 땅은 주님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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