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류의십자가 | 운영자 | 2012-04-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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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십자가(눅23:26,32~43)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여러 지역에서 시행된 사형법 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서도 십자가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형법은 두 가지였는데, 참수형과 십자가형입니다. 참수형은 칼로 목을 베어 처형하는 것으로 로마 시민이나 자유인이 범죄했을 때 시행했습니다. 반면 십자가형은 노예, 살인강도, 반역자 등을 처형할 때 시행했습니다. 이 십자가형이 특이한 것은 육체의 고통도 컸지만, 큰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사형이 확정되면 로마 군병이 채찍질을 한 후 사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사형수는 자기가 매달릴 육중한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고 행진을 합니다. 보통 사형장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급적 먼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 고문당하고 채찍 맞으신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 나무(약 40kg)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가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에 가보면 골고다 언덕길을 추정해서 만들어놓은 기념 코스가 있죠.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이란 뜻입니다. 약 800m 정도의 코스인데, 언덕길이라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고문과 채찍질을 당해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를 짊어진 채 그 길을 갔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십자가도 있습니다. 강도의 십자가도 있고, 나중에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진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 종류의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이 세종류의 십자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저주의 십자가 : 강도가 진 십자가, 모든 죄인이 질 십자가 첫번째는 강도가 진 십자가로 ‘저주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죄인이 져야 하는 십자가로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온갖 사형법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잔인한 사형법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사형법들 보면, 교수형, 총살형, 가스형, 참수형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흔히 프랑스 대혁명 당시 시행된 단두대를 가장 고통스런 것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사람을 실컷 고문한 후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아 가능한 한 오랜 시간 피를 말려 죽이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법입니다. 그 고통은 한 마디로 ‘지옥의 예고편’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본래부터 잔인한 저주의 형벌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그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구약시대에 흔히 사람을 처형할 때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악한 죄인을 나무에 달아 죽였는데, 부정 타니까 속히 장사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최악의 저주입니다. 십자가 고통은 지옥의 예고편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지옥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실재를 언급하면서 지옥의 고통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 마디로 지옥은 뭐라고 했나요?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사망은 존재가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원히 살되 영원한 고통을 겪는 겁니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죄 지은 손을 찍어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저주의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양쪽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본문 32절, ‘행악자’라고 했는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극형에 처해진 것을 보면 살인강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죽 읽어 보면, 한 사람은 예수님을 끝까지 비방하고, 다른 사람은 오히려 욕하는 그 사람을 꾸짖고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가만히 지쳐본 결과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나중에 회개한 강도가 다른 강도에게 한 말입니다. 40절~41절(상).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무슨 말입니까? 너나 나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을 읽으면 “아!! 저 사람들은 진짜 끔찍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힐 수 밖에 없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래도 저런 사람보다는 선하고 의롭게 살고 있으니.. 그런 저주는 받지 않아도 되!!” 이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지는 않나요? 이 강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류의 운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운명을 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어쩔 수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죽음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많은 백성의 애도 속에 고상하게 죽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진짜 파리 목숨처럼 죽는 인생도 있습니다. 어떤 대접을 받으며 죽느냐 그것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5: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러분,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조금 충격적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모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어요.. 불과 1여년 전에 함께 만나서 맛있는 오리 바베큐 먹으며 교제를 나누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폐암이 오시어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올해 75세 정도 밖에 안된 분이세요.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모든 인간이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죄 때문에 사망의 저주를 받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그런데 우리가 이런 죄와 그로 인한 저주를 인정하면서도 명심할 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인생이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는 것으로 끝나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김정일 처럼 온갖 악한 짓을 하며 살든, 히틀러처럼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든.. 게으르게 살든, 술주정뱅이로 살든, 마약에 찌들여 살아가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그냥 흥청망청 즐기다가 가면 그만인 것을.... 지금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아무런 답도 관심도 가지지 못한 채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 이후의 세상이 분명히 있다면.. 그리고 성경에서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도래 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정말 아무렇게나 살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 죄를 가진 채 저주의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2] 대속의 십자가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우리가 두 번째 바라봐야 할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골고다 세우진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이나 강도들이나 겉으로는 똑같습니다. 모두 저주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다른 겁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그곳에서 회개한 강도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41절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것이 바로 회개한 강도가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죄가 있어 십자가의 저주 사망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 인가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저주 받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위해 기꺼이 저주를 받은 바 되어 그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백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십자가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사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의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 곧 나를 위한 십자가이며... 나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 ...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허물과 죄의 저주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고, 나음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인간의 운명을 영원히 좌우합니다. 십자가 대속을 믿고 하나님과 화해하며 구원받고 영생(永生)을 얻느냐, 아니면 믿지 아니 함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는냐? 본문을 보면 강도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각각 영원한 운명으로 갈라지는 것을 봅니다. 42절 보세요! 회개한 강도가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 ...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 그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십자가 달린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를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구세주이심을 믿게 됐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고백과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43절. “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 낙원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가실 때 회개한 강도를 데려가시겠다는 약속하십니다. 아슬아슬했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께 직접 구원을 보장받는 은혜을 얻었습니다. 다른 강도는 끝끝내 죄를 고백하지 않다가 가운데 영원히 멸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반응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내기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길 뿐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다시 말해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떡하든 십자가를 전하려 한 것입니다. 행4:12 보면 베드로가 뭐라고 증거합니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님 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해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게 위해 이 예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 영화”를 보신 분이 있습니까? 대학생선교회(C.C.C.)에서 1979년 제작된 이래 680개 언어로 번역 더빙되었고, 세계 각처에서 수십억이 시청했으며(오디오 포함),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제작자가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존 헤이먼(John Heyman)입니다. 러셀만이란 사람이 길을 가다 한 사람을 만나 전도했는데, 그가 바로 존 헤이먼입니다. 그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데, 이렇게 고백 ... “일생 동안 사람을 위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으나 이제부터 주님을 위한 영화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영화가 바로 「예수 영화」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믿습니까? 그러면 이미 영생을 얻었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복된 길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3] 순종/사명의 십자가 : 그리스도인이 질 십자가 이제 이 주님의 이 십자가는 세 번째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번째 십자가는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 진 십자가요, 우리가 질 십자가입니다. 무슨 십자가 일까요? 바로 순종과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본문 26절 보면,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올라가실 때 일어난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었는데, 군병들이 징발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멀리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성전 순례를 오던 시몬이란 사람이 붙잡힙니다. 예수님이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십자가를 더 이상 지고 갈 수 없어 대신 지고 가게 한 겁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인데 지금의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입니다. 긴 여행길에 피곤했을 시몬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재수 없다고 투덜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가운데 그는 은혜를 입고 그의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구레네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가 예수 믿고, 아내도 믿고, 아들들도 믿게 됐는데, 그들이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그것이 순종과 사명의 십자가면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게 바로 순종의 십자가,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욕망대로 살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① 순종의 십자가 : 순종의 십자가는 어떻게 지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며 사는 겁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내 이익과 달라도, 내 경험과 달라도 나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겁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라켓볼 아시죠. '루우벤' 이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라켓볼의 영웅이었습니다. 최종 결승전 동점인 팽팽한 경기에서 숙적에게 마지막 서브를 힘차게 보냈습니다. 심판은 주춤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이 라인 안으로 떨어졌는지 밖으로 나갔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부심들과 의논합니다. 그때 관중들이 "루우벤! 루우벤!"하며 응원합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심판이 선언합니다. “In!”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루우벤이 나섰습니다. 마이크 앞으로 나온 그가 관중을 진정시키며 말합니다. “제가 친 공은 아웃입니다. 제가 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 선수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며칠 후 기자 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들이 수십만 불의 상금과 커다란 명예 앞에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 루우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합은 이길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 양심을 팔 수 없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그 잘난 내 자존심 때문에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세태에 큰 교훈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순종의 십자가입니다. ② 사명 : 우리 각자는 재능을 따라 위치에 따라 사람의 현장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직분이나 책임을 맡았습니다. 감당하기가 쉽지 않죠. 바쁘다는 핑계로, 손해 보기 싫어서,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서 수시로 회피해 버립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도망가고, 남은 자들도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만나주셨고, 성령 강림 후 변화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너무 어려워서 중간 중간에 회피할 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A.D. 64년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주님이 나타셨습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게 바로 유명한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대신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즉시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이때 스스로 요청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대말려 죽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라. 십자가를 피해서 다른 데로 가면 더 무거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토마스 아 켐피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co-heirs with Christ)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고난 주간을 맞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 십자가를 통해 나의 순종과 사명을 다시 돌아보며 기쁨으로 감당하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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