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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운영자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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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24절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세가지 비유에 대한 소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라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고상한 자, 점쟎은 자만 찾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들,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죄인들도 찾아 구원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오셨음을 나타내 주는 소중한 3가지 비유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이고 마지막 하나는 오늘 나오는 말씀인 잃어버린 둘째아들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모든 것은 원래 주인의 소유였는데 주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풍성한 잔치를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잔치를 벌일 정도이면 이것은 보통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매우 특별한 소유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또 다른 특징은 처음에서 나중으로 갈수록.. 의미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인데 이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안다.. 100마리 가운데 하나이지만 목자는 양을 절대 외면치 않는다... 99마리가 목자 품에 있어도 목자의 마음은 양에게 있다... 그래서 양을 찾아 산으로 들로 나선다...

그리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10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크마는 부인에게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치우고 쓸고 하면서 그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찾으면 얼마나 기쁜지... 결혼에 골인한 것처럼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잃어버린 아들 다른 말로 탕자의 비유는 이제 양도 드라크마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아들이다.. 비유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실제상황을 전재로 하고 있다.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 10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 두 사람 가운데 한명...

점점 집약되어 온다... 그리고 목자가 아는 양에서 남편이 사랑하는 증표인 드라크마로,,, 그리고 아비의 모든 사랑이 담겨있는 아들에게로.. 점점 깊어져 오는 것이다..

앞의 두 이야기를 그냥 잃어버렸다고 말만하고 있다면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잃어버린 영혼을 묘사할 때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아버지와 큰아들 작은 아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두 아들은 오늘날 우리들을 나타내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 잃어버린 아들, 쉽게 표현하자면 탕자의 비유를 한번 들여다 보자..

이 탕자의 비유는 오늘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되는 인생의 모습을 말해주는 귀한 예화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가? 11,12절 말씀이다.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아버지의 품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에게서 떠나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욕심 때문이다.. 12절에 보면 내게 (돌아올 분깃을 ) 내게 주소서...‘내게 내게내것을 내게 달라.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 아들 속에 있다 보니.. 아버지 밑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불만으로 지금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눠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재산의 분깃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에게 돌아갈 재산을 달라는 것인데 이는 엄청난 불효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버젓히 계시는데 그런 분을 앞에 두고.. 나에게 재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것은...엄청난 불효이다. 이는 아버지 빨리 죽어주세요.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욕심이 생기게 되면 이런 불효 뿐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생각과 행동도 써서름 없이 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이 아들에게는 아버지 곁에 있다고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부족함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 품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자기 혼자 뭘 해서 아버지를 호강시켜드리려고 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당당히 자기 분깃을 받아 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아.. 아들은 이제 자기 혼자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젊음이 가기 전에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엉뚱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하여 아버지 품을 떠나 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청소년 보호 위원회에 따르면 가출 청소년들의 가출 이유가 34%는 부모와의 갈등 때문이었고, 13.4%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 7.7%가 부모의 지나친 기대, 학교 생활 싫증이 3.7%나 된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 모든 이유의 근본을 조용히 살펴본다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부모가 간섭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뜻대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그 환경을 떨쳐 버리고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가 하나님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이의 결과>

이 아들이 아비께 재산을 받아 아비의 품을 떠나고 어떻게 되었는가? 13~16절이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게 아버지의 품을 떠난 오늘날 인생의 현주소이다.

에이 그 사람은 운이 나빠서 저렇고, 잘되는 사람도 많이 있쟎아요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아니다.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비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절대 진정한 형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출발의 동기가 좋지 않으면 과정이라고 해서 좋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했을 때 그 땅에 흉년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인생에도 말 못할 추운 계절이 닥쳐왔습니다.

 

청소년 보호위원회가 일전에 전국 중고 남녀 학생 1351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출한 이후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대부분 공원벤치나 공중 화장실 등을 배회했다고 합니다. 서울지역에서는 두산타워, 밀레오레등 대형상가가 밀집해 있는 동대문 일대나 한강일대를 배회했다고 답했습니다. 응답자의 23.4%가 가출한 이후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잠을 잤고 길거리나 빈집, 길거리에서 밤을 보낸 청소년도 무려 9%나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친구집, 유흥업소, 노래방이나 찜찔방, 혹은 비디오방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대한 가족 복지협회가 지난 5월 선도 보호시설에 입소한 10대 여자 청소년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6%가 가출한 이후 성관계를 하고 임신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가출한 인생, 아버지 곁을 떠난 인생... 그의 삶은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은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돼지와 함께 우리에서 거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돼지가 먹는 음식도 먹지 못해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났지만 빈곤과 비참함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고 온 몸과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버렸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자.. 결국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17~19절입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우리는 이를 가리켜 회개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간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며 희망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고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면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희망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룻과 나오미 이야기를 너무 잘 압니다. 나오미는 자기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압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재기해 보리라 생각하지만 재기는커녕 남편 죽고 아들 죽고 자기 몸둥이 하나와 며느리 룻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오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결단합니다.. 그리고는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는 자신을 괴로움이라는 이름의 마라라 부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살리십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 인생이 다시 살고 데리고 온 며느리 룻을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에 일어나서>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20절 입니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그 아들이 잘못을 깨닫고 돌아가야 되겠다는 마음만 먹은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결단을 했다면 이제는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집나간 자식이 이것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가출해 본 분은 아시겠지만..(그러면 제가 가출을 해봤느냐? 해봤습니다.. 하루만에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잘못했다는 마음은 하루에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일어나 돌아가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가 살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생이 살 길은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 탕자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입니까? 저 동구밖 언덕에 아버지가 서 계시는 겁니다.. 아직도 돌아갈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와 부둥켜 앉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봤다는 것은... 아들이 집나간 이후 오매불망 하면 돌아올까 돌아올까? 시간만 나면 동구밖 잘 보이는 곳으로 나가 아들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루터교회의 어느 목사님이 기차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에 근심어린 얼굴을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하고 이야기를 좀 나눌까?”라고 말을 건네었지만, 그 청년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릴 뿐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다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젊은이, 나 루터교회 목사인데, 뭐 고민되는 것이 있으면 나하고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가?” 그제서야 그 청년은 , 목사님이시군요. 실은 이제 한 시간 반을 더 타고 가면 저의 집이 나옵니다. 저는 고향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과수원을 돌보고 있었는데, 해마다 농약을 뿌리고, 가지 쳐주고, 거름이나 주는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데, 싫증을 느껴 1년 전 집에서 많은 돈을 훔쳐가지고 도시로 나왔습니다.

 

제 딴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갚아드리려고 했는데, 다 탕진하고 무일푼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편지를 했죠. 며칠 날 몇 시 기차로, 그곳을 지나가니까 저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제일 큰 사과나무에 하얀 수건 하나를 걸어달라고요. 저는 마음이 떨려서 내다 볼 수 없으니 목사님이 좀 내다 봐 주실 수 없겠습니까?” “, 내가 내다봐 주지.” 이윽고 기차가 그 청년의 집에 이르렀을 때, 목사님의 눈에 멀리서 큰 사과나무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사과나무에는 수건 하나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 가지마다 수많은 하얀 수건들이 걸려있었고, 높은 언덕에 어머니가 서서 긴 앞치마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음이 떨려서 창밖을 보지 못하는 청년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이보게 청년. 빨리 창밖을 보게나. 자 빨리 고개를 들게.” 그 청년은 목사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수건 하나 걸어놓았다가 행여나 아들이 보지 못할까봐 가지마다 걸어놓고, 그것도 부족하게 느껴진 어머니는 언덕에 올라가 앞치마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미운 짓을 했다 할지라도,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그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문 밖에 나와 서서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 소식이 없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저 멀리에서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갑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갑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탕자가 한 걸음을 옮길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 가셨다.” 그렇습니다.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측은히라는 말은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함께라는 의미의 ‘Com’느끼다라는 의미의 ‘Passi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Compassion’이라는 말에는 공감하다’, ‘더불어 느끼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묘사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가장 잘 공감하신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허랑방탕한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아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깊이 공감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향해 입을 맞추며 키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21).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그래, 네가 이제야 너의 잘못을 깨달았구나!”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한마디의 꾸지람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다왔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재산을 어디에 허비했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다 알고계십니다. 우리의 죄와 실수 허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돈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이 다시 아비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자식의 권세를 회복하고 잔치까지 배설하시는 아버지>

아버지가 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온 자식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합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아들이 걸치고 있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집안에 있는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반지를 그에게 끼워주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고대시대에 제일 좋은 옷은 곧 아버지의 옷을 의미하는데 이를 입혀주었다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함과 더불어 관계를 회복해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반지는 당시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애굽의 바로 왕은 자기의 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끼우며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에 임명하였는데(41:42), 이것은 바로 왕이 자신의 권한을 요셉에게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자식에게 반지를 끼워줬다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로 권리가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종이 아니라. 너는 누가 뭐래도 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는 것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시 종은 발에 신을 신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는 아들이 종으로 돌아왔으나 신을 신겨줌으로 너는 이제 종이 아니라.. 나의 아들이요 자유인이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23,24).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온 자식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위해 잔치까지 배설해 주십니다. 이 잔치는 아들에게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말고 이제 진짜 아들로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이는 다시 살아난 나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제는 진짜 아들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의 결론을 맺으며 한 분 이야기를 하고 마칠까 합니다. 윤항기라는 가수를 아실 것입니다.

저는 이 분을 잘은 모르지만 제 윗세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전에 유명한 가수였습니다. 한창 인기가 있을 때에는 너무나 바쁘게 지내느라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만 나다녔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몇 년.. 그러다가 폐병에 걸리자 그 많던 친구들과 주변사람들이 썰물처럼 자기 곁을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아픈 사람을 싫어하고 특히 폐병 걸린 사람은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지요.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인기가 땅에 떨어지니 그는 너무너무 외로웠습니다. 이제 몸도 병들고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끝장 난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3년 동안 떠나 있던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빨리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자기를 버리는데 예수 믿는 아내 한 명만이 집에 들어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오랫동안 가족을 돌보지 않았는데도 예수 믿는 아내는 들어오라고 했어요. 집에 들어갈 면목이 없는 죄인을 아내가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 찾아와서 함께 예배를 드려주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송을 부르며 함께 기도하고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변화되어 지금은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많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변화될 수 있고.. 주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버지의 자녀로써 그 권세를 회복할 수 있고, 아버지가 배설하는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초청하고 계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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