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이 되십시오 | 운영자 | 2012-04-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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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절~10절 주님의 기쁨이 되십시오.. <주님의 기쁨> ‘주님의 기쁨이 되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자녀를 기르다 보면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아이는 하는 행동이 참 귀여운 아이가 있는 반면에 어떤 아이는 천덕꾸러기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첫째 둘째는 머리들이 좀 컸다고 요령도 피우고 말썽피우는 일들을 종종 합니다. 그런데 셋째는 이제 100일 가량이 지났는데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잘 아프지도 않고 잠도 비교적 잘 자고. 잘 웃고 가족 전체의 기쁨이 되고 있어요. 안 안아주면 앵~ 하면 울다가도 안아주기만 하면 싱글벙글..웃는데.. 그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가족전체가 행복한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주님의 기쁨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해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너무 기쁘셔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옆엣 분들게 이렇게 한번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은혜의 교회 속한 모든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가요?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기뻐게 하는 인생이 바로 이런 인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이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경건 생활을 하면서 성경 번역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예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감격한 제롬이 예수님 앞에 머리 숙여 말했습니다. “주님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저에게 있는 것을 다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이 다 나의 것이다. 하늘과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거늘 네가 무엇을 줄 수 있겠니?” “주님 사랑합니다.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수도원 생활이라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저에게 있는 이 돈을 받아 주옵소서” 주님은 계속해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필요한 그 돈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제롬이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빈손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드리면 좋을까요?” 그 때 예수님은 엄숙히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롬아! 내게 기쁨이 넘치는 선물을 하고 싶다면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하는 저 세상 사람들에게, 믿지 못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그들에게..이 복음을 전해라. 이것처럼 내 마음에 기쁨으로 채울 선물은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우리 주님이 그토록 기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10절에 “7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0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회개치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속히 회개하고 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그러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 즉 잃어버린 자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또한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이것이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하고 또한 우리의 기쁨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에 주시는 우리 주님은 교훈은 무엇일까요? 1. 한 영혼을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 주변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이런 세리나 죄인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 정도 되는 사람이 어떻게 죄인들과 가까이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랍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좀 구별해가며 사귀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들을 영접할 뿐 아니라 식사까지 나누며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세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이고 나머지는 집나간 탕자의 비유입니다... 먼저 첫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목자가 양을 기르다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그 양을 찾아 돌아와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그 벗과 잔치를 벌였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목자는 100마리의 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중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해서 없어져버렸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목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 마리 중 한 마리인데, 그 정도야 뭐!!’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양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없으면 포기하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그러지 않습니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목자는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길과 산으로 다닌다고 말합니다.. 양 아흔아홉을 들에 뒀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관심을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을만한 다른 사람에게 잠시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목자가 아흔아홉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서까지 한 영혼을 찾으러 다닐 정도로 지금 이 목자의 마음은 한 영혼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마리 에 비하면 한 마리는 너무 작은 숫자이지만 이 한마리가 지금 목자의 품을 떠나 거리로 들로 방황하고 있기에... 목자의 마음이 이 한 마리에 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목자의 생각은 지금 빨리 양을 찾지 않으면 맹수를 만나 찢겨 죽을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영혼을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목자는 그 한 마리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찾으러 갑니다. 목자는 영혼의 가치를 ‘양(量)’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경제적 가치를 따라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가치고 보면 1/100은 별것 아닌 숫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한 영혼은 1/100이 아닙니다. 하나하나가 전부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한명이면 그 하나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세 명이면 1/3만 사랑하나요? 아닙니다. 3명이든 10명이든 동일하고 사랑하되 전부를 주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영혼을 바라보시는 마음이며,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국밥집에 점심한 때 바글대던 손님이 뜸해진 오후 시간 한 할머니와 땟국이 줄줄 흐르는 아이가 식당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국 밥한 그릇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뚝배기를 밀어놓았습니다. ‘할머니 정말 점심 먹었어?’ 라고 하자 그러지 않은 것 같은데 먹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주인이 안타깝게 여기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할머니는 우리 집 백번째 손님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공짜로 국밥 한그릇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주인이 무심코 창밖을 쳐다보니 그 어린 소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린것이 국밥집 길 건너에서 쪼그리고 손님이 들어갈 때마다 돌맹이 하나를 동그라미 안에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점심이 다 지나도록 쉰 개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다급해진 식당주인이 단골손님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바쁘지 않으면 국밥 한 그릇을 공짜로 먹으러 오라는 것입니다. 여든둘 여든 셋... 소년의 샘이 빨라졌습니다. 아흔아홉의 돌 맹이가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갔을 때 소년은 황급히 할머니 손을 이끌고 국밥집으로 들어섰습니다. “할머니 이번에는 내가 사 드리는 거야” 진짜로 백 번째 된 할머니는 국밥 한 그릇을 받았고, 소년은 깍두기만 오물거렸습니다. 국밥을 맛있게 먹던 할머니가 손자에게 “좀 남겨주랴?”하고 하자 배를 쑥 내밀고 “아니 난 배 불러. 이거 봐 할머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날 이후 그 국밥집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날마다 백번째 손님, 이 백 번째 손님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게 되면 할머니나 손자나 아니 주인이나 모두 한 사람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는 그런 마음이 있는 거여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길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보실 때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보시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체를 소중하고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수많은 무리들... 그들이 사회의 따돌림받는 죄인이든 종교적 대접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든... 많은 영혼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은 기뻐 뛰며 어쩔 줄 몰라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한 영혼의 존재가 그토록 소중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 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또 다른 교훈이 있다면 바로.. Ⅱ. 나와 관계된 사람이 주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처자가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아주 작고 어둡습니다. 집 바닥은 울퉁불퉁한 진흙 바닥이고 그 위에 건조된 갈대나 풀이 덮여 있기 때문에 동전을 한번 잃어버리면 찾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을 켜고 쓸기 시작합니다. 집의 온갖 구석과 틈까지 샅샅이 쓸다가 드디어 한 드라크마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찾고는 기뻐가지고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다는 내용이에요. 당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그토록 열심히 그 한 드라크마를 찾습니까? 그리고 한 드라크마보다 훨씬 경비가 많이 드는 잔치까지 열며 기뻐할까요? 이 드라크마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법에는 신랑이 신부와 결혼할 때에 사랑의 증표로 당시 황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드라크마 열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랑과 결혼한 신부는 이 열드라크마로 머리띠를 하거나 목걸이를 하고 항상 지니고 다녔습니다. 심지어 잠잘 때도 하고 잤습니다. 집 안이 어려워져서 모든 것을 처분할 때라도 그것만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드라크마는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과 축복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랑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드라크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사랑을 찾고 또 찾는 것처럼 그 드라크마를 찾을 때까지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한 영혼을 보실 때도 이와 같이 보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열 개 가운데 하나 빠지면 아홉 개로 목걸이 해 다니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열 명 줄 한사람이 교회를 안 나와도 아홉이나 남았는데 뭘 걱정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절대 영혼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보실 때... 잃어버린 한 영혼을 보실 때... 잃어버린 드라크마처럼 도저히 잃어버리면 안되는 특별한 대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 한 영혼을 위해 독생성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살찟고 피흘리기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한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 남편의 언약이 드라크마에 담겨 있듯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 그 영혼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를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을 바라볼 때... 이 영혼을 위해 우리주님 살찟고 피흘려 주셨다는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주님이 믿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또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영혼을 보실 때 절대 하나라는 가치를 보지 않습니다. 지금은 하나라도 그 가치는 100, 1000, 10000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드라크마의 가치는 동전하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43대 대통령인 부시는 56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40세까지는 완전히 문제아였습니다. 20대부터 방탕하여 극심한 알콜중독자, 바람둥이에다 마약까지 복용했다고 합니다. 부시가 40세 되던 해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데, 한 친구가 전도를 합니다. 술에 취한 자리에서 교회에 나가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교회에 나온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술자리에서도 전도할 수 있어요!!) 이상한 것은 그 이후 술만 먹으면 몸이 마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완전히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고, 탕자에서 대통령까지 변화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면 나타나는 능력이에요.. 이렇게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 영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그 영혼이 세상에서 방황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온 집안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야죠!! 땅끝 까지라도 달려가서 찾아야지요!! 찾아서 하나님께로 데리고 나아와야지요.
Ⅲ. 그러면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해야 합니까? 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양이 떨어진 자리,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찾고 또 찾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생의 가장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기꺼이 식사하셨고.. 창녀를 위로해 주셨고, 문둥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죄인을 멀리했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거룩만 외칠 것이 아니라 예수사랑가지고 친히 주님처럼 죄인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윌로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어느 모임에 갔다가 이슬람 사람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이슬람 형제가 자신에게 “멋진 책들을 쓰셨더군요”라고 하는 인사를 받게 됩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이 이슬람교도가 어쩐 일로 기독교 서적을 다 읽었다지?”라며 생각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식사 후에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의 간증을 들을 수가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미국에 와서 남부 도시에 있으며 이슬람교도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혼자 벽을 보거나 구석에 처박혀 있곤 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그 모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늘 외톨이었지만 이런 삶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모임에 갔는데 여전히 외톨이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득 방 저편에서 비슷한 부류와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눈을 돌려서 혼자 벽에 딱 붙어 있는 자신을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건너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하더랍니다. 서로 소개도 하고, 가족, 사업, 스포츠 이야기로 하다가 대화 내용이 믿음이란 주제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망설이다가 이슬람교도라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근본 원리를 설명해달라고 하더랍니다. 어떻게 거기에 헌신하게 되었는지 정말 알고 싶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거의 매주 만났는데 열심히 귀를 기울어 주는 모습에 감명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힘을 다해 도와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이제 서서히 마음문이 열립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의 신앙이 궁금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의 신앙에 대해 묻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던 경험들과 다시 그리스도께 일생을 반친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깊은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록 가까워지게 되었답니다. 그런 친절을 경험하다가 한번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너무 강하게 느껴 자기감정을 하나님께 모두 쏟아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빌하이벨스는 ‘저 쪽으로 건너가는 간단한 행동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쪽으로 건너가는 간단한 행동’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주님도 높으신 천국에서 시공을 건너 우리를 위해 이편으로 건너오셨기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이 수고를 해야 할 때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주님께 소중한 한 영혼을 찾아서 주님의 품에 다시 안겨드리기 위해 저 쪽으로 건너가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물론 귀챦기도 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낙심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한 영혼이 많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거두게 될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찾을 때까지 찾다가 잃은 양을 찾게 되면, 잃은 드라크마를 찾게 되면... 그 기쁨은 천국잔치의 기쁨일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감격이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찬양 -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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