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
성도에게 중요한 것 운영자 2012-04-05
  • 추천 0
  • 댓글 0
  • 조회 638

http://szgrace.org/bbs/bbsView/124/2422955

성도에게 중요한 것 누가복음 141~11

 

<청함을 받는 귀한 자리>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나를 존대해 주고 특별하게 대해 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친한 관계이든 그렇지 않든,, 초대를 받아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지난 주에 상해에서 교회를 섬기는 귀한 동역자들이 제가 머문 소주까지 와서 저희 교역자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하면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참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에 머물다 보면 누군가 만나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많지 않은데 가끔씩 이렇게 시간을 내어서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바리새인의 잘못된 초청>

오늘 본문에 보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어떤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시게 되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썩 그런 것만은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도 였느냐? 바로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려 정죄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어디서 그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까? (1절을 보여줌)

떡 잡수시러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 들어가는데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여기서 저희가 누구냐? 3절에 보니 그들은 바로 율법사들과 또 다른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함정 파놓고 예수님을 거기로 유인한 것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하나 보자!!’ 예수님의 행동하나 말한 마디에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경계태세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그날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날이고, 하나님 앞에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런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느냐 하면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규례를 39가지나 만들어 가지고는 하나하나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 바느질 2) ()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을 까부는 일 7) 곡식을 고르는 것 8) 곡식 등을 가는 일 등등 9) 빵을 굽는 12) 양털 깎는 16) 실을 잣는 일 17) ( 따위를)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등등...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면 여지없이 안 됨이라는 잣대로 규정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율법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이미 예수님께서 3번씩이나 바리새인을 세워놓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은 인간의 진정한 안식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실 이 안식은 하나님이 인간을 복주시고 영광받기 위해 세운 날인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복과 영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안식의 주인으로 오시어 인간의 참된 안식을 회복케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날 주님과 함께 한 영혼,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온 영혼을 모두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고창병이 든 사람>

오늘도 이 자리에 안식일을 맞아.. 바리새인 두령이 있는 그곳에... 매우 특별한 한 사람이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로 고창병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고창병 든 사람이 마침 주님 앞에 딱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불순한 의도를 주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어 사업이 좀 잘 되 보리라!! 예수 믿어 출세 좀 해 보리라!! 예수 믿어 병이 좀 나아 보리라!! 학생 같으면 예수 믿어 공부를 좀 잘해 보리라!!

주객이 전도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지 예수님은 간 곳 없고, 나의 성공 나의 명예 나의 공력 이런 것만 앞선다면 그는 불행한 자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하는데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나의 명예 출세만 보인다면 그것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믿고 따르다보면.. 그런 것은 나중에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힘들어도 바르게 믿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가 전부 그것을 증명하고 있쟎아요. 주객이 전도되면 안됩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의 두령을 보세요.. 주님이 그의 집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복된 발걸음을 하셨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자기 집에 찾아오셨는데 그것만큼 복된 발걸음이 어디 있어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로마의 장교 백부장이 자기 집에 사랑하는 종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그가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 예수님께 이 종을 좀 돌아 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때 이 장로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어요. 그때 그 소식을 들은 백부장이 다른 종을 보내어 말합니다. 아이쿠 주님... 제 같은 죄인의 집에 주님이 오시다니요.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오면 제 종이 능히 낫겠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주님께서 말씀으로 그 종을 고치시며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런 모습에 비하면 지금 주님이 친히 바리새인의 집에 찾아오시어 식사하고 교제를 나누시겠다니 얼마나 감개무량한 자리입니까? 그러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지금 그들은 주님의 놀라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불신앙으로 주님을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 앉은 이 환자는 고창병이 걸렸다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신장과 간장에 물이 차오르는 병으로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앞에 의도적으로 이런 사람을 앉혀 놓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물이 차서 불룩한 배를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앉아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주님을 그들의 집에 초대한 수장으로써 좀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다분히 의도적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우리 주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주저 않고 달려가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무리들도 복음을 들어야 할 불쌍한 영혼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은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거기에 모였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적의 소굴로 기꺼이 들어가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시는 거여요..

 

이금 이 장면 속에 주님은 거기에 모인 무리들에게 질문을 하나를 던지십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주님은 지금 안식일에 일을 하고 하지 않고의 논리로 접근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살리느냐? 살리지 못하느냐? 생명을 구원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이런 논리로 접근하십니다.

사실 거기에 모인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배가 고파 쩔쩔매고 있는 영혼, 귀신에 사로잡혀 헤메이고 있는 영혼, 병마에 사로잡혀 고통가운데 있는 그런 영혼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한 채 하나님께 나아온 영혼들을 율법의 잣대로 정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의 모습만 갖춘 채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서 주변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나아온 영혼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고통과 억압 가운데 사로잡힌 영혼.. 죄의 저주로 신음하는 영혼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안식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아온 영혼에게 뭔가 대답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항상 그러하듯 바리새인들은 대답하기가 곤란하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들이 대답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고창병의 저주를 가진 그 영혼을 그 자리에서 고쳐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문제의 해결자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문제를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라 문제를 짊어지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8: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할렐루야!!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

이렇게 고창병이 들린 그 사람을 고치시고 부연해서 다음 설명을 하십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이 말씀은 1315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말씀과 유사합니다.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냐그런데 오늘 5절의 이 말씀을 13장의 말씀보다 더 강도가 셉니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갈증을 없애는 것이지만 지금 그 아들이나 소가 물에 빠졌는데 끄집어 내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지금 사람이나 아끼는 짐승이 죽어가는데 그것을 그냥 보는 것이 가능하냐?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지 않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어오면서 정작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무엇을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외식적인 신앙인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이런 것에 사로잡혀 버리면 진짜 불행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신앙을 율법적으로 보는 거여요. “교회에는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 물론 하지 말라는 계명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물론 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는 거여요.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는 거여요. 지금그것 말하려고 하는 거여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심만 기울이다 보니... 지금 문제를 가진 영혼을 앞에 두고 정죄할 줄은 아는데... 정작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 되는 거여요..

 

여러분, 예수 믿어도 그렇게 믿으면 안됩니다. 문제가 있어요!!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허물이 있고 부족하죠. 그런데 그런 사람을 자꾸 자신의 의로운 잣대로 바라보면 허구한 날 비판하다가 시간 다 지나가는 거여요.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는 엄격한 율법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한없이 인내하고 너그럽고 참아주는 사랑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살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얼마나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지요.

목사가 저것도 못해!! 장로 집사라고 하면서 저 정도 밖에 못되!! 예수님 믿기 전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니.. 그럴 수 밖에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가 가리움 받은 자이며 한량없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일만달란트 빚졌다가 값없이 탕감받은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바라보더라도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주님은 고창병 가진 영혼을 정죄의 잣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되었어”!! 이게 아니라 내가 저 영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거여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런 시각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지체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번 상상해 보세요.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이런 모습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교만과 겸손 (7-11)>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도 위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이 사랑을 상실한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신 후.. 또한 너무도 비신앙적인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래도 무엇인가 달라야 하는데... 더군다나 율법을 사랑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세상적인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발견된 것입니다. 7~9절 말씀입니다.“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레오나드 번스타인에게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번스타인은 주저하지 않고 2 바이올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아해 하는 기자에게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저는 제1바이올린 주자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열정을 가지고 제2바이올린이나 제2프렌치 혼이나 제2플롯을 연주 할 사람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아무도 제 2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뒷 자석에 앉는 것을 의미하며, 1주자를 보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낮은 자리를 싫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낮은 자리는 종이 된다는 것이며, 2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며, 공로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남모르게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명예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거나, 남보다 뒷자리에 앉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많은 지도자들이 바리새인 두령의 청함을 받았는데 서로 두령과 친분을 과시하려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안달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자에 대해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높이지 말고 스스로 낮추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자기를 낮출 때.. 때가 되면 높아진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속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청함을 받고 상석에 앉아 있다가.. 다른 더 높은 사람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앉을 자리가 없어 말미에 가서 앉아야 되는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챙피하고 무안합니까?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대접받기 좋아하고, 드러내기 좋아하고, 상석에 앉기 좋아하다가 나중에 무안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얼마든지 그런 논리가 성립됩니다. 직급에 따라 앉는 자리가 결정됩니다. 월급도 다르고 받는 대우도 다릅니다. 차도 다르고요. 집도 다릅니다. 그래서 무슨 집에 사느냐? 무슨 차를 타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대하는 격도 달라진다면서요. 군대에서 대령이 스타를 달게 되면 달라지는 것이 무려100가지가 훨씬 넘는다면서요.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자신의 그런 신분을 내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신분을 보고 자리차지 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할렐루야!!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은혜의 지체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명심 한다면 우리 가운데 높아질 사람이 하나도 없을 줄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한다 [벧전5: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아십시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내가 겸손하면....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때가 되면 다 높이시게 되어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니까 거기에 보좌가 쭉 늘어서 있는데 높은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보좌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안내자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게 될 의자이니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스승이지만은 너무나 화려하고 높은 보좌를 보니 질투가 났습니다.

그 일이 지난 어느 날, 스승을 만난 제자는 조용한 시간에 스승인 프랜시스에게,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라고 쉽게 대답했습니다. 제자는, “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 강도, 살인, 도적질 등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거든.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있는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셨다면 그분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네.”

제자는 말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알게 되니 얼마나 겸손하게 되나요? 우리들 또한 이런 겸손의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겸손의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할 줄 압니다.

 

저는 교회를 섬기는 여러분들을 보면 참 감사한 그런 마음이 있어요!!

사회에 가면 다 대접받고 인정받는 위치에 계신 모든 분들이 이 교회에 와서 굳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바깥에 서서 주보 나눠주고, 안내하고, 찬양대로 섬기고, 물건을 나르고, 의자도 정리하고 교회의 곳곳에서 봉사하며 섬기시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주신 것은 덤으로 주신 축복으로 여기고 이 교회에서는 그저 주님을 섬기듯 성도들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이 모습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의 봉사에 놀라운 축복과 기름부음이 임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주님의 천국잔치 운영자 2012.04.05 0 1008
다음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운영자 2012.04.05 0 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