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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운영자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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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31~35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로젠베르그라는 유대인 가족이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붙잡혀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이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중 작은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약간의 신체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다 처리할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독일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만 살려 두었습니다. 일할 수 없도록 약해지거나 병이 들면 곧 독가스 실로 끌고 가 죽였습니다.

 

매일 새벽이 되면 로젠베르그 가족은 각각 다른 작업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두 아이들도 각각 다른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부모는 어린 아들에 대한 염려로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 지냈습니다. 혹시 일을 제대로 못하는 작은 아들이 독가스 실로 끌려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저녁에 막사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작은 아들이 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와 보니 큰아들이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동생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어 독일군이 독가스 실로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되었니? 아직 안 왔니?" 그러나 큰아들은 떠듬떠듬 말했습니다. 독일군이 동생을 잡으러 왔을 때 동생은 너무 무서워서 엄마를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동생을 꼭 껴안으며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 함께 가자! 엄마는 끝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엄마는 작은 아들과 함께 독가스 실로 끌려갔습니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가야 할 길>

우리는 지난 주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 길은 분명 가치있는 길이며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길을 가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중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은 그나마 예수님께 상당히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살짝 귀뜸해 줍니다.

다름이 아니라 통치자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세우고 있으니 어서 여기를 떠나라는 정보였습니다. 이런 정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생사와 관련된 정보이니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만약 우리 같으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 대사(大事)는 다음에 도모하고 일단 목숨부터 살리고 보자, 그러면서 급하게 자리를 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당신의 때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지금 좁은 문으로 기꺼이 들어가려하십니다. 주님은 이 길이 주님이 가야 할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31절에서 33절 말씀입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미국의 빅터 고어츨이 지은 <세계적 인물은 어떻게 키워지는가>란 책을 보면 세계적인 인물로 길러진 사람들의 두드러진 2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신념을 쫓아 남들이 하지 않을 일을 기꺼이 행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끈기있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간혹 뛰어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낙제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책은 좋아하긴 했지만 학자타입은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사람을 사귀는 쪽에 더 재능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대인관계를 넓히는데 주력하였고... 대통령이 된 것도 대인관계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은 진단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는 수줍음이 많고 말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프로포즈한 여인에게 차이기까지 했겠습니까? 하지만,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 열세 살 때부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교 수업이 지겨워 거의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고 시험 때문에 벼락치기 공부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실에서 보내거나 포커를 치며 보냈습니다. 결국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소프트웨어 사업에 뛰어들어 그 분야에 최고가 됩니다.

 

세계적인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흑인 민권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흑인 대학에 다녔지만, 정작 자신은 그 운동에 열정을 쏟아붓지는 않았습니다. 동료 학생들에게 배신자로 폄하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TV 방송 출연에 집중하여 거기서 더 위대한 일을 감당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보아도, 대부분 자기만의 독특한 컬러를 갖고 믿음의 길을 걸어 간 사람들임을 보게 됩니다.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노는 데, 혼자 홍수를 대비하여 큰 배를 지었습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고 미래가 보장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땅으로 나아갑니다.

세례요한은 영적, 정치적 암흑의 시대에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안고 광야로 나가서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꿀을 음식으로 삼아 기도하며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탁월한 지성인이요,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요, 로마의 문물을 익힌 뛰어난 글로벌 리더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만이 가야하는 길, 온 세계를 품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주님은 어떠한가요? 예수님은 바로 모든 신앙인의 본이 되는 그런 길을 기꺼이 걸어가신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있는 길이었지만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강한 권력이 도사리고 있고, 엄청난 장애와 박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이 길이 십자가를 위한 길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죄에 빠져 헤메이는 영혼들을 구원할 길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주저함 없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을 보게 됩니다..

 

<헤롯을 향해>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우리 주님은 당시 최고의 권력이었던 헤롯왕에게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주님은 당시 권력자인 헤롯을 향해 여우라는 표현을 쓰며 실날하게 비판합니다.

왜 여우라고 불렀느냐? 우리가 권력자를 아무렇게나 불러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지금 선지자의 이름으로 이런 표현을 쓰고 계십니다.. 즉 그가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이고,, 성도에게 한 잔악무도한 일이 바로 여우같이 쓸모없는 너무 간사한 일이었기에 주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그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헤롯 안디바스는 악평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지금 이런 자가 예루살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헤롯은 어둠의 세력.. 사탄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이런 세력이 있다고 주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죽음을 가져오는 길이라 할지라도...

 

<적용>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방해세력이 없겠습니까?

저희 집에 저희 어머니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아버님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가 믿음을 가지고 오래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합니다. 어머님이 새벽기도를 갔다 오면 가끔씩 다툴 때가 있어요. 그러면 여지없이 어머니께서 기도하고 오니까 저 마귀가 꼭 나를 이렇게 시험에 빠지게 한다. 그럽니다.

이러면 되나요? 안되나요? 안됩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이기려고 노력해야지.. 당사자를 두고 마귀니.. 사탄이 역사해서 그렇느니.. 그러면 쉽게 해결될 문제도 더 악화되고 힘들어 집니다. 그럴 때는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구나!! 생각하면서 신앙으로 이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은혜가 있는 곳에 죄가 넘쳐나고 유혹과 핍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방해세력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굴하지 말고. 묵묵히 뚜벅뚜벅 앞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에서 작별인사 하는 바울>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두로라는 도시에서 제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제자들이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하여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는 감동을 받습니다. 심지어 어떤 선지자는 구체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까지 바울이 받을 박해를 예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 하였노라 하니” (21:13)

 

지금 우리 주 예수님의 심정은 바울보다 더 의연했을 것입니다.

32,33"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여우같은 헤롯은 비록 예수님을 죽이려 안달하지만 오늘과 내일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는 사역을 계속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는 실존주의 철학작 스피노자가 한 유명한 말처럼.. 비록 그 앞에 구원의 사역을 가로막는 무서운 세력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주님이 걸어가실 길을 가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주변에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말고 묵묵하게 걸어가고자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론 좋은 일도 있겠지만 슬픈 일도 만납니다. 은혜도 받지만 힘든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하는 일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의 길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3일에 완전하여 지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사역의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3절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이 가신 길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 손 꼭 붙들고 살면 주님이 우리를 절대 그냥 혼자가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크리소스톰의 삶>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떠날 때 행한 마지막 설교가 아주 명언입니다.“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와 같이 주님을 위해 살다가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주님을 섬겨간다면 주님이 입은 영광 우리도 입게 될 줄 믿습니다..

[8: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

이어서 나오는 장면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는 말씀이다. 34절 말씀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얼마나 은혜와 기쁨의 장소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이 흘러넘치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제사가 머물던 곳... 그래서 시편기자의 찬송의 메아리가 끊이지 않았던 장소...<찬양> 예루살렘~ 예루살렘~ 오 거룩한 성아!! 주의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이런 예배와 찬양이 넘쳐나던 곳... 그곳이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넘쳐나는 성소가 있어... 하나님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믿고 섬기며 열방을 향해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할 예루살렘이건만....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백성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랍비들이 모여 있고,, 소위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 모여 있는 그런 곳 아닙니까?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하며 갈릴리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천대하며 종교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는 그런 백성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는데.,,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에요.. 거룩의 처소가 되어야 할 성전이 탐욕과 도둑의 소굴로 바뀌었고,,, 기도의 처소가 되어야 할 주의 전이 사람들의 유흥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없고 신앙의 형식만 뻔드러지게 남아 있는 그런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주님이 채찍으로 그들을 몰아내시며.. 종교지도자들은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면서 책망을 하셨겠습니까?

좁은 길로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면류관이 아니에요. 그 길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은 그러지를 못했어요.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 사람이라도 그들을 싫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품어시고 또 품어주셨다..

본문 말씀에 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선지자를 보내시고 또 보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반증입니다. 만약 그들을 사랑치 않았다면 선지자를 보낼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게 배역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들..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섬기는 그들을 그냥 심판해 버리면 될 일이지... 뭐하러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고 회개하라고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어가는 영혼이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선지서들을 읽어보면 정말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눈물 나도록 놀랍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돌아오도록 하기위해 선지자를 보내사 말씀을 전하시는데 어떤 선지자는 감금을 당하고 폭행당하기는 일쑤입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고생의 떡을 수백일 동안 먹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오늘 본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암탉에 비유해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암탉이 새끼를 모으는 모습을 보세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합니다. 먹을 것을 찾아 주고 맑은 물을 마시게 합니다. 적이 오면 몸을 던져 막아 냅니다. 암탉이 거느리고 있는 곳에 강아지가 나타났습니다. 암탉이 날개를 펴고 달려가 한방에 날려 버립니다. 강아지뿐인가요 사람에게도 달려듭니다. 사람이 병아리를 만지려고 해보세요. 얼마나 요란을 떨고 달려드는지 몰라요. 그 뿐이 아니지요. 암탉은 자기새끼를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닭장에 모이를 주러갔다 신기한 장면을 발견했어요. 닭장에 닭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권사님은 장로님을 부러러 갔다가 죽은 닭이 뭐가 대수냐고 하면서 닦달합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권사님께 닭을 유심히 봐라고 그럽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죽은 닭 깃털 사이로 노란 주둥이가 쏙 나왔다 들어가고 쏙 나왔다 들어가고 하는 겁니다.

알고 보니 족제비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안고 보호하기위해 족제비한테 물려 죽을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틴 거예요.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를 부르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느껴지셔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말씀사역자를 통해 말씀을 주시며 당신의 백성을 모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품으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를 외면하고 그를 버렸던 예루살렘 사람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아멘~ 하며 무릎 꿇고 나아가기만 하면 그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이 손을 내밀어도.. 받기를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그런 백성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있습니다.. 영접해야 할 때가 있고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마지막 35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거기에 모인 무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지금은 누구나 주님을 만날 수 있지만 잠시 후에는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 백성을 향해 마지막 애절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돌아와라!!

진일아.. 진일아... 돌아오라!!

이제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을 뵐 수 없습니다. 오직 다시 만날 때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영혼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은 영혼만이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오늘도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시는 주님... 그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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