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시며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 운영자 | 2012-0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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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10절~17절 치유하시며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미국의 TV 토크쇼 진행자였던 오프라 윈프리의 이름을 여러분 모두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미국, 나아가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녀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여러분도 한두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매번 일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 토크쇼를 보았다고 합니다. 왜 그녀의 토크쇼가 인기가 있었을까요? 오프라는 흑인 여성입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의 삶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생활고로 어머니가 키울 수가 없어서 외할머니의 손에 자라면서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또 어린 시절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우한 시절의 아픔을 지녔던 이 여인이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그 가난함,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대담자와 함께 털어놓습니다. 때로는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 이런 공감을 마음껏 쏟아 붓고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남몰래 부르짖던 대담자들이 오프라와 함께 대화하면서 ‘나만 이렇게 외로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토크쇼의 장점이요, 오프라 윈프리의 장점입니다. 그녀는 대담자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면서 이렇게 자기의 성공을 표현합니다. “저의 토크쇼에 출현하는 분들은 마치 저를 친구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저를 그렇게 대하죠. 그건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아마도 제가 철저히 저 자신일 수 있는 것이 그 비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친구가 되는 것만큼 감성적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간 다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주의 날 아침, 이 이른 소중한 시간에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친구가 되시며,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시고, 우리의 상처 난 부분을 친히 만져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우리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삶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껴안으시고, 우리의 상처 난 부분을 친히 만지시는 우리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담대하게 그분 품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입견으로 보지 않으시는 예수님>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인간을 보는 방식,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한번 선입견을 가지게 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나보다 연약한 사람, 나보다 못난 사람, 나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머리에 한번 입력을 시켜 놓으면 좀처럼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지를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신다면 아마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만약 죄인으로써 나를 판단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실 때에 그런 선입견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회복 불능의 사람이야!! 저 사람은 도저히 안되!! 절대 변화될 수 없어” 그런 선입견으로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할 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에게 접근하십니다. 변화될 사람이라고 기대하십니다. 치유될 사람이라는 믿음을 그 마음속에 품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적이고, 따스하며, 친구와도 같고, ‘당신은 변화될 수 있다. 당신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접근하고 계십니다. 10절 11절 말씀입니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님은 이 날도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마 구약의 말씀을 읽고 이를 해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먼저 들어온 사람은 예수님 앞에 자랑스럽게 앉아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회당 저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듯 앉아 있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여인>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이 여인은 허리가 완전히 꼬부라져가지고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런 여인 이었습니다. 하늘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런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적인 환경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여인으로 태어나 얼굴이 좀 못생기고, 어디 상처가 있고 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망가진 상황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활동을 거의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말합니다.. 제가 송명희 시인이야기를 지난 번에도 했지만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난 이 여인에게 어릴적 마음은 죽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했쟎아요... 아마 지금 이 여인의 상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이 여인이 ‘귀신까지 들려 앓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심령도 완전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는 그런 여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 주위 사람들은 이런 여인을 두고 다양한 반응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상종도 하지 않고 피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리의 걸인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귀신이 들려 회당 구석에서 항시 신음하며 기도하는 여인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지나칠 것입니다. 혹은 이런 여인을 향해 야유와 조소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여인은 죄가 많아 귀신 들렸어!!”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런 병에 걸렸지!!”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지었담!!” 쯧쯧...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을텐데.... 조소어린 마음으로 아무런 동정심 없이 그녀가 지금 만난 이 불행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로 가득찼을 것이다.. <예수님을 붙드는 여인의 신앙> 그러나 이와 같이 최악의 상황임에도 - 귀신이 들려 영이 피폐해져 있고 몸은 꼬부라져서 도무지 펴지 못하는 그런 불편한 상황이었음에도... 이 여인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래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안식일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회당으로 달려와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P) 우리 인생에 있어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 바깥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는 학교폭력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쉬쉬하다가 결국 터진 것이 아닙니까? 저도 중학교 때 당해봐서 아는데 정말 죽고 싶도록 괴롭습니다.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하면 나중에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선배들에게 당했지만 그 때 하나님 찾았거든요.. 이 여인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누구를 찾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갖고도 회당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혼자 힘으로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돌발행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보고 너 같은 여인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고통의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여인의 중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옛날 시골에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몇마을을 건너 교회가 하나씩 세워져 있곤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80가까이 되신 할머니가 5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서 교회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그 나이에.. 몸도 다리도 편치 않으실 것인데.. 정말이지 신랑되신 예수님 뵙고자 하는 열정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적용>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앉아 계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였더라도... 어디로 달려와야 할까요? 예수님께로 달려와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되겠지!!’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것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십니다. 일의 시작도 예수님이시오 일의 끝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시작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1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믿음을 가진 여인> 지금 본문에 나온 이 여인은 진짜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등이 꼬꾸라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고.. 귀신이 들려서 몸도 마음도 제정신이 아닌 그런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이 계신 회당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오더라도 그냥 나오지 말고 어떤 마음의 자세로 나아와야 합니까? 따라해 봅시다. 믿음을 가지고~~히11장 6절에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할렐루야!! 믿음이 있어야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나아오는 것도 은혜이긴 하지만 나아왔다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병든 이 여인이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 그분이라면 나의 병을 고칠 수 있어!! 그분이라면 나의 인생을 바꾸실 수도 있어”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나요? 13절에 안수하여 낫게 되었을 때 그 즉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16절에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명령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또한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귀신이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봐야 하는가요? 인생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참된 자유, 참된 위로, 참된 기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주변만 맴돌아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안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동안 사셨느냐?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어떠한 상황가운데 처해 있느냐?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다 똑같다는 거여요.. 귀신들려 앓으며 꼬꾸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이 여인이나... 나중에 나오지만 백성에게 존경받는 회당장이나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똑같은 인생이라는 것이에요... 무려 18년 동안이나~ 예수님 없이 마귀가 들려 살았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조금만 더 일찍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런 고통에서 자유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마귀의 종으로 병마에 시달려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을... 반전) 그런데 18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렇게 고통가운데 보냈음에도 이 여인이 예수님을 기다리다..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의 치료를 경험하고 구원을 경험 할 수 있게 된 것은 복중의 복이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회당장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있고, 몸도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안식일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을 모셔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율법과 형식에 얽매인 나머지... 왜 안식일날 일을 하느냐? 병자를 고치느냐? 이런데 관심은 있었지.. 정작 그 영혼이 주님을 만나는데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질문)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의 분위기가 어떠한가. 그 분위기에 관심이 있나요? 누가 찬양을 잘하고 기도를 잘하고, 목사가 설교를 맛깔나게 하나 못하나 이런 곳에 관심이 있나요? 그런 외적인 것에 형식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면 여러분은 불행한 자들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분을 경험하고 성부성자 성령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이 참된 예배요. 주님이 찾으시는 자인 것입니다.. <예배란?> 여러분, 오늘 이시간 주님 앞에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너무 점잖게.. 고상하게 나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면 됩니다. 여인보세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은 여인이에요.. 18년 동안 받은 상처인데 어지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습니다. 상처를 내어놓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렇게 꼶아 있습니다. 이렇게 슬픕니다. 이렇게 밑바닥에 있습니다” “예수님..저 좀 살려주세요” 이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것이 예배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만나주십니다. <이런 여인을 향한 우리 주님의 반응> 그렇다면 오늘 주님은 18년 동안 고통가운데 있다가 주님께로 나아온 이 여인을 어떻게 만나주셨습니까? 12,13절 말씀입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주어로 하여 4가지의 동사가 나오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여인이 갖고 있는 고통 속에 관여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인생을 보십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보시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인생이라도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그를 굽어 보십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불러~” 보실 뿐 아니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 )야!! 나에게로 오라!! 내 품으로 오너라.. 나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너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오늘 여러분이 처한 각자의 상황에 대해 형편에 대해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병든자를 향하여서 ‘네 병에서 놓여 강건할지어다’ 하십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를 향하여서 ‘그 어려움에서 놓일지어다’ 하십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에게 ‘귀신아 물러갈 지어다!!’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시어 당신에게 나아온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안수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안수하셨다는 것은 친히 만지졌다는 매우 입체적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육체적으로 생생한 안수를 경험할 수는 없을지라도.. 영으로 우리 각자를 만지시고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어 당신의 백성의 상한 마음을 만지시고 갈급한 영혼을 만지시기 원합니다. 답답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가진 백성들을 만지시기 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만지게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저는 은혜의 지체들이 우리 주님의 이런 안수~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만져주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저는 한번씩 이런 만져주심을 경험합니다. 그때는 주체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앞을 가려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에 내 편이 되신다는 생각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그 안수하심이 일어났을 때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18년 동안 가졌던 모든 문제들이, 모든 응어리들이 한 번에 녹아내리는 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안식일의 주인> 14절 말씀입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래서 치유시켜 주신 날은 다름 아닌 안식일이었습니다. 오늘식으로 말하자면 주일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보다 그 껍데기에 메달려 그 능력과 영광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본 의미는 무엇인가요? 15~16절에 보면 설명되어 나옵니다.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안식일(주일)은 자유함의 날입니다. 생명의 날입니다.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기쁨을 맛보는 그런 날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그 형식과 규범에 얽매여 그 껍데기만 유지한 채 본질은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이런 여인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그냥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 예배를 드린다고 달라질 것이 뭐가 있으며 나아질 것이 뭐가 있는가?” 믿음이 없는 사람은 꼭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배드린다고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그러면서 그냥 종교의식에 위안을 받고 주님을 만나고 회복되고 치료되고자 하는 아무런 기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18년 동안이나 사단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 매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유케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안식이요 진정한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기적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새생명을 이루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안식이요 기쁨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가 온 성도에게 넘치기를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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