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도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 운영자 | 2011-10-04 | |||
|
|||||
고린도전서 9장 16절~19절 우리는 전도를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 삶을 이 땅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이 재미있게 영어로 풀어놓았습니다. 영어로 출생과 죽음은 Birth, Death인데 그 앞자인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C가 있습니다. 그러면 B가 Birth 출생을 의미하고 D가 Death 곧 죽음을 의미했다면 C 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말하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기다라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대답을 영어권에서는 선택 곧 Choice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곧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 곧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직업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결혼보다도 직업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선택입니다. 신앙의 선택은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로 하신 선택... 진짜 소중한 선택을 하신 줄 믿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한 선택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어 그렇게 된 줄 믿습니다. 옆엣 분들에게 축복 - “예수님 믿기로 진짜 잘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신앙의 선택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믿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이제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또한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 만나고 나서 이 선택을 잘 했기 때문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해야 할 선택 가운데 가장 뜻깊고 중요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를 위한 선택입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들이라 해서 다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전도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2005년도에 한미준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국 갤럽과 함께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실태를 조사한 일이 있는데 거기서 <지난 1년간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26,4%였고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한 교인들이 무려 73,6%에 달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가운데 전도하는 사람은 4사람 중 1사람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수치가 오늘날에는 더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전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전도는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무관심한 삶을 살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1. 복음전도는 의무이다. 자, 그렇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기 바라며 이 복음전도가 우리에게 왜 중요한 것인지. 바울을 통해 전해주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함께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해야 하나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쉬운 성경을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고 번역하고, 공동번역을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현대어 번역을 보면 “복음 전하는 것을 그만 둘래야 그만 둘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룩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용조 목사님께서 얼마전 소천 하셨는데 살아생전 아픈 곳이 너무 많아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있었답니다. 폐결핵, 당뇨, 고혈압, 간염, 간경화.. 이것이 나중에는 간암으로 번져 6차례나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신부전증을 앓으시면서 일주일에 3차례나 주기적으로 투석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이 아픔에도 질병이 있어도 아프다는 이유로 설교를 거스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부름받기 직전까지 강대상을 지켰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전도에 대해 이런 부담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기대에 대한 부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심에.. 그냥 구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낳고 아무 생각 없이 기르나요? 아니죠!! 자녀가 한명이든 10명이든 부모가 낳은 자식이라며 그 자식에 대해 가지는 기대가 있쟎아요.. 제가 두 아들을 낳고 아들을 향한 기대가 없다면 공부를 하든 안하든, 나쁜 짓을 하든 안하든 그냥 내버려 둘거여요..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하면 나무랍니다. 나쁜 짓을 하면 매도 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자녀 삼으실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자녀 삼으신 거여요.. 제가 새벽기도 시간에 등록카드를 가지고 한 영혼 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감사가 넘치고 축복이 막 되는 그런 영혼이 있고 어떤 영혼은 재발 이렇게 성장해 줬으면 하는 그런 영혼이 있는 거여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부르시고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이사야 49장 15,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말씀을 보니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아니 분초마다 우리를 보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하면 박수치기도 하기도 하시고, 칭찬하기도 하십니다. 못하면 마음 아파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의 복음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자식을 향해 이렇게 해 줬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 때는 그것을 자주 말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잊지 않도록 합니다. 공부를 좀 잘 해줬으면 하는 부모는 “공부해라 공부해라!!” 귀가 따갑게 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부모의 말 속에 부모의 기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보려면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령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복음증거와 관련된 명령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기르시면서 특별교육을 시키신 것이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시기 전 이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며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도 바로 이 전도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까? 4복음서는 주님의 사역이 열거된 말씀인데.. 이 주님의 사역 가운데 말미부분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바로 전도에 대한 명령입니다. 마28:18~20절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 16장 15절에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24장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이 복음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을 들고 이웃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였어요. 소원이었어요.. 이것이 너무 중요하니까!!!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명령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도 될까요? 우리의 대사령관이신 예수님이 하신 명령인데 적당하게 그냥 넘어가도 될까요? 안됩니다. 군대 용어를 빌리면 <명령 불복종>인데 그것이 가벼운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함께 한번 따라해 봅시다. “전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매우 준엄하며 놀라운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전도가 의무일 뿐 아니라 또한 특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복음전도는 특권입니다. 바울이 전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을 빌리자면 전도는 화를 막는 복이라는 말도 됩니다. 전도가 너무 준엄한 명령이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치지만 전도하게 되면 화가 오다가도 나를 피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해 보십시오.. 풀리지 않던 일들도 풀리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도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보세요... 보디발의 집에 끌려가도.. 감옥소에서 있어도 전도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뜻을 보이시리이다!!” 전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의 문제를 한 순간에 풀어주십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에서 국무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전도하면 화가 왔다가도 도리어 그 화가 더 큰 복의 과정이 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세요.. 전도하되..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전도를 의무라고 말하고,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괴롭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특권입니다. 군인이 전투를 할 때 그 전투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나요? 전투를 승리할 때 나라를 지킬 수 있고 나라를 지켜야 가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면 전쟁전리품을 받을 수 있고, 그것으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이 힘들어도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도 그러합니다. 전도함에 보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보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17절의 시작 부분을 보십시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바울은 전도를 단순히 의무로만 자각함이 아니라, 자의로 기뻐서 행한다면 거기에 상급이 따를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전도는 거룩한 의무일 뿐 아니라,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상급이 약속된 특권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8절을 읽어 보실까요?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여러분, 이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이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므로 받는 상급이 마땅히 있는 줄 알지만 자신은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상급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그 상급을 다 받아버리면 하나님께 받을 것이 줄어들까 싶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 전도의 십자가를 지는 그 자체가 자신의 특권이요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개인병원에 근무하는 자원봉사 권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이 병원의 원장님이 장로님이신데... 자기 병원에 와서 10년 이상 꾸준하게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하시는 이 권사님이 너무 귀하고 고마워서 어느 해 추석날 봉투에 한 2백만 원을 넣어 감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분이 원장 실로 찾아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투를 내놓고 정색을 하면서 항의하기를 “원장님, 왜 제 상급을 빼앗아 가려고 하십니까? 제게 이런 것을 주시면 제가 겨우 이런 물질의 보상을 바라고 여기서 봉사한 꼴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것을 받으면 저는 더 이상 이 곳에서 기쁨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장님이 오히려 이 권사님의 순수한 믿음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고백이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의 바울의 고백이 그런 차원의 고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에게는 전도 그 자체가 즐거움이고 감사였던 것입니다. 때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통 그것까지도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면 ‘십자가를 지는 감격’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바울에게 전도는 즐거운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도를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 전도지 사건, 지난 금요기도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3. 복음전도는 사명입니다. 다시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물론 자의로, 자원하는 즐거움의 심정으로 전도하고 있지만 때로 이런 즐거움의 마음이 동반되지 않는다 해도 전도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사명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명(직분)’이라는 말은 본래 집 주인이 집안일을 믿을만한 청지기에게 신임하여 맡길 때에 쓰여 지는 말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하나님이 당신을 신임하셔서 하나님의 가족된 자신에게 맡기신 특별한 과업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의 과업은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는 너무 소중한 사명입니다. 오직 그의 자녀들에게만 맡겨 주신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운데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270장, 새508)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찬송가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침례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특별한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가 270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런데 캐슬이 그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이 아닌 훌 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은 못 벌고 인간적인 대접도 못 받게 되었지만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침례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 목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되신 것 후회가 안되시나요? 목사 안 되시고 의사하셨으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실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캐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뭄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난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우리도 이 세상 있으면서 천사도 흠모할 이 귀한 복음을 만민에게 전함으로 천국의 기쁨 누리는 여러분과 저가 되길 기도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