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 운영자 | 2011-1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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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 4~5절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과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두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제가 아카페 사랑에 대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가르침은 바울선생님과 같이 신앙의 간증도 있고, 좀 아카페와 가깝게 사시는 그런 분이 이런 말씀을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준비하면 할수록 제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돌아보면 볼수록... 아~ 참 내 삶은 아카페의 삶과는 많이 멀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전하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라는 이 말씀은 제 허물과도 정면으로 딱 부딪히는 그러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메스컴을 들여다 보면 심심챦게 등장하는 사건 사고가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감정의 통제가 잘 되지 않아 홧김에 저지러는 사고들이 있습니다. 지난 8일에 경남 창원에서 아파트 윗층에 사는 사람이 하도 시끄럽게 해서.. 몇 번이고 주의를 줬는데 말을 듣지 않자 홧김에 그 집 앞에 불을 질러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이 중국에는 비교적 사생활이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어떤 경우는 지난 12일에 충북 충주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중에 남편이 분에 못이겨 집에 불을 질러서 경찰에 입건되는 그러한 사건도 있었다.. 어디 그것 뿐인가요? 어디서는 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상대방을 칼로 찔러버리는 경우가 생기지를 않나. 홧김에 지나가는 여성을 폭행해 버리지를 않나.. 자신을 무시했다고 이웃 주민을 상해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어요... 그것 뿐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화를 내는 것 분을 발산하는 것을 나열하라고 그러면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여러분은 지난 한 주 동안 화를 내지 않았나요? 부부는 서로에게 부모는 자식들에게 화를 내지 않은 채 한 주를 지냈나요? 그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임을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한다면 성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고상해... 너무 높은 도덕수준을 요구하고 있어!!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그것을 다 지킬 수 있어.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아예 노력해 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키지 못할 계명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지킬 수 없는 말씀이라면 뭐하러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그냥 하늘에 꼭꼭 숨겨놓으시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덕적 열심으로 행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도덕적 열심히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내지 않는 것과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도 그러합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다 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것도 됩니다. 자 그러면 성내는 것 곧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한번 살펴봅시다. 잠언 14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화를 내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급하게 화를 내게 되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언 29장 2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또한 급하게 화를 내면 죄를 짓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러지 말아야 합니다. 홧김에 일을 저질러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이 말 안듣는다고 홧김에 분을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렸다가.. 자식이 집나가고 나서 나중에 후회합니다. 부인에게 홧김에 분풀이를 했다가 부인이 밥도 안차려 주면 누가 손해입니까? 혹 없어지기라도 하면 그때 후회막급입니다. (그렇다고 집을 뛰쳐 나가면 안됩니다..) <화를 삼켜야> 성도는 화를 삼켜야 합니다. 홧김에 행동하면 안됩니다. 성내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It is not easily anger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쉽게 화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사랑은 화가 나도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쉽게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아내에게 화가 나도 화를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에게 화가 나도 그 화를 참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하 직원에게 화가 나도 화를 쉽게 내지 않는 것이 아카페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식을 길러 보니까... 이게 참 잘 안되요... 이전에는 자식이 말해도 듣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말하다가 큰소리가 바로 나왔는데 요즘은 조금 요령이 생겨..1부터 5까지 세어요!! 그러면 어지간하면 말을 들어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습관이 되어서 말하면 바로 순종 안하고 1부터 5를 셀 때 까지 반응을 안하는 거여요. 은근히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아요.. 특히 둘째녀석이 그래요... 마음 같아서는 고약해서 꿀밤을 한대주고 싶지만... 그래도 전에 보다 많이 양호해졌다는 생각에 참습니다.. 서양속담에 화가 나면 10까지 세어라...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100까지 세어라!!는 격언이 있어요... 쉽지 않지만 우리가 실수하지 않으려면,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라고 하면서 나의 화를 억누를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화를 쉽게 내지 않는 그 내면에는 상대방을(그가 아무리 어린 아이든, 아무리 비천한 자이든간에) 하나님의 동등한 형상임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이 어떤 존재이든간에 내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기에 내 감정과 기분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고 존대해 줄 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해야 할 자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에도 이렇게 대해 주셨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2장 20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베드로 보십시오. 얼마나 혈기가 많고 실수가 많은 제자입니까? 한밤 중에 풍랑이는 바다위로 주님이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주님인 줄 알아보고는 ‘나도 한번 그 위로 걷게 해 주세요’ 부탁하여 물위로 걷다가 풍랑을 바라보며 곧장 물속에 빠져가면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던 사람.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고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시겠다고 했을 때는 자기 꿈이 사라질까 싶어 주께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됩니다고 항변했던 사람..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홧김에 잘라버린 사람. 심지어 나중에 예수님 못박히실 때는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사실 이 베드로의 인생은 오늘날 우리의 인생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좌충우돌 넘어지고 자빠지고.. 주님을 실망시켜도 한없이 실망시켰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 많은 베드로이지만 이런 베드로를 향해 우리 주님은 단 한번도 화를 내시거나 혈기를 부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기다리시고 참아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킵니까?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또 참아 주십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꺼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 또한 우리 형제 이웃을 향해 동일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의로운 화> 그리고 사랑은 쉽게 화내지 않는다는 이 말씀 속에 또 하나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화를 내더라도 바른 곳에 화를 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 합니다. 우리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마치 아카페는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를 안낸다는 게 아니라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이고 화를 내더라도 마땅히 내어야 할 곳에 화를 내야 함을 말합니다.. 마귀는 화내지 말아야 할 곳에 화를 내게 합니다. 사랑해야 할 가족, 교회, 지체, 직장에 있는 사람, 식당의 점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화를 내게 합니다. 여러분, 이들은 화를 내야 할 자들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화를 내야 합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화내야 할 곳은 불의와 죄악에 화를 내야 합니다. 거기에 침묵하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화를 내셨습니다. 어디에서요?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바꾸는 사람들.. 장사꾼들이 우굴거리는 것을 모습을 보시고는 화를 내셨습니다. 주의 성전은 기도하는 곳인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거여요. 그러니 성전의 예배는 형식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준비된 예배를 드리기 보다 예루살렘에 놀러오기 일수였어요.. 그래서 그 모습에 주님은 분노하시며.. 비둘기 파는 자를 몰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의 상을 엎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채찍을 만들어서 그들을 그곳에서 몰아내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타락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화를 내신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를 의로운 분노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데나 분노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향해서, 영혼을 향해서는 한없이 기다리고 참아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하면 안되는 곳이 있습니다. 의로운 분을 가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질 때, 예수님의 이름이 부끄러이 여김을 받을 때. 그때는 우리의 마음이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이런 거룩한 분노가 생겨나야 합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나와 이스라엘을 모욕할 때..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악의 세력에 모욕을 받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삼상17장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러분, 이런 분노가 있나요? 물론 우리가 분노가 있다고 어떤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불만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어려울 때 이런 기도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왜 불신자와 똑같이 사업을 하는데 당신의 백성이 힘들어 하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좀 증거를 보여주세요!!” 예수믿는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데 이런 불만이 안 생기면 이상해요..
신앙생활 하면서도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런 불만이 생겨야 해요. “나는 왜 신앙이 이 모양이야? 이정도 밖에 안되?” 성숙되지 못하는 여러분의 모습에 거룩한 화가 생겨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문은 왜 이정도 밖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더 큰 복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어야 해요. 이런 신앙의 성장통이 생겨야지 믿음도 자라고 복도 임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살펴볼 아카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위에 것과 연관이 많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항상 선한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악을 낳고 선은 선을 낳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는 악한 것만 생각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으면 악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구미의 한 원룸에서 젊은 남녀들이 죽어있는 것을 그 집 주인이 발견해서 신고를 했습니다. 모두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장래가 청청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각자 유언을 남겼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살기 힘들다. 고통스럽다 주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젊은 나이에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워도 살려고 몸부림치고 해쳐나가려고 노력해야지.. 힘들다고 못살겠다.. 죽겠다... 그러면 안되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자기는 편하게 죽을지 몰라도 남아있는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아도 대못을 박는 것 아닙니까? 악한 것을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악한 생각이 나에게 슬거머니 다가오더라도... 그것 과감히 물리쳐 버려야 합니다. 사랑은 악을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바꾸어 생각할 줄 압니다. 성경에 “[잠16:32]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면 긍정적 자세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집의 딸이 귀한 반지를 잃어버리고 집에 와서는 화를 내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왜 그렇게 화를 내니? 네 손가락을 잃지 않았으면 감사해야지. 반지야 돈 주고 다시 살 수 있잖아. 만일 네 손가락을 잃어버렸다면 어디에서 다시 사겠니? 감사해라 귀한 반지를 잃어버렸어도 생각을 잘 하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강도를 만났어도, 많이 빼앗겼어도 내가 강도가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내가 돈이나 물건만 잃고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서울의 한 부잣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창고에 들어가 쌀을 퍼내는데, 주인 마님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전깃불을 켰습니다. 영감, 쌀 도둑이 들어왔나 봐요. 빨리 쫓아내세요. “여보, 얼마나 답답하고 배가 고팠으면 우리 집에까지 왔겠소. 쌀 좀 퍼 가게 그냥 둡시다 쌀을 다 퍼 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아무리 많이 퍼 가도 우리가 먹을 것은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러지 말고 빨리 나가서 쌀 도둑을 쫓아내세요. “여보, 그러지 마요. 좀 퍼 가서 먹게 해요. 그런데 너무 조용해져서 주인이 나가보니, 도둑이 담아 놓은 쌀 한 자루만 있고 도둑은 없었습니다. 전깃불이 켜지고 말소리가 들리니 도둑이 겁이 나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주인은 대문 밖에 나가서 소리쳤습니다. 여보시오, 밤손님. 어디 계시오? 얼마나 어려웠으면 내 집에까지 오셨겠소? 내 아내가 전깃불을 켰다 껐다 하며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오. 여기에 쌀자루가 있으니 어서 가지고 가서 식구들하고 드시오. 이 쌀이 떨어지면 또 오시오. 놀라게 해드려 미안하오. 나는 이제 대문을 닫고 들어가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쌀자루가 없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그 부잣집 식구들이 모여서 집안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쿵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 보니 담 안에 자루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방에 갖고 와서 보니 몇 년 전의 바로 그 쌀자루 안에 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금광을 캤는지, 크게 성공하여 쌀을 금으로 바꾸었는지 몰라도 그 때의 일이 고마워서 그 쌀자루에 금을 가득 담아서 갖다 준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감격한 주인이 이 귀한 것을 우리가 쓸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아니라도 잘 살고 있지 않나?하며 그것을 그대로 숙명여대에 기증했습니다. 그 후 크게 발전한 숙명여대는 그 어른을 이사장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심방하면서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어떤 분은 자기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언제부턴가 쌀과 화장지를 조금씩 가져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 가지고 트집잡지 않고 “얼마나 어려웠으면... 얼마나 쪼달렸으면 그러겠나” 싶어...알고도 그냥 넘어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이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감히 나를 뭐로 보고... 쌀을 훔쳐가!! 화장지를 훔쳐가!!” 이러면 큰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대인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쌀도둑이 나중에 금괴를 가져올지 누가 압니까?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씀은 원어상에 보면남이 나에게 악하게 한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악하게 한 것을 기록하지 말라, 쓰지 말라, 새기지 말라,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개 집사님이 나에게 잘못한 것, 어머니가 나에게 실수하신 것, 남편과 아내가 내게 잘못한 것, 친구가 내게 잘못한 것을 내 마음의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처럼사람들이 내게 원한 맺히게 한 것, 악하게 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그럴 수도 있지 뭐!!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나쁘게 해도어떤 사연이 있었겠지하며 마음의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지워버리는 것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두고 보자.하는 것은, 남이 내게 잘못한 것을 내 마음 판에 새기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참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억울하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 내게 잘못한 것을 아예 내 생각에도 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담고 있으면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서 웃을 수가 없습니다.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는데, 그것을 담고 있으면 늘 불편하니 결국 속병도 오고 관절염도 오고 혈압도 높아져 일찍 죽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좋지 않게 한 사람이 있어도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며 다 잊어버리면 내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니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어 보여도 그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지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것이 기록되어 있으면 ‘성령의 지우개로 지워 주세요‘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옛말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과거에 내게 스트레스를 주고 나를 아주 언짢게 한 것이 내 마음에 기록되어 있으면, 오늘 성령님께서 그 모든 것을 제거해 주셔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악도 품지 않는 것> 또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악이라도 품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는 말씀이 나옵니다. 작은 악이라도 슬그머니 넘어가면 나중에 큰 악이 됩니다. 혹 생각이라도 악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교인만 아니라면 저것도 좀 해보겠는데... 내가 교인만 아니라면 나이트도 가보고 단란 주점도 가보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얘야, 너 언제 철들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숨어 있는 마음을 다 보십니다. 사람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쁜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죄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바로 행동의 어머니입니다. 닭이 달걀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듯이 우리가 죄를 품으면 결국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품으면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은 그림자도, 모양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악한 것은 생각을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 선한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제일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가장 복된 사람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떤 분을 사랑하면 그분을 자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누구는 운동을 하면서도, 목욕하면서도 나를 생각하는구나. 그래, 쟤는 밥을 먹으면서도 나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그랬습니다. 앉으나 서나 말씀을 묵상하는 자 그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하나님의 아카페를 기억하시며 승리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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