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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운영자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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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오늘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중국이 급속히 산업화가 되면서 곳곳에서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부작용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중국 광동성의 한 도시에서 온라인 게임 중독에 빠진 젊은 부부가 자신들이 낳은 3명의 아이를 게임비를 벌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온라인 카페에서 만나. 서로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동거를 시작했는데 동거하면서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자식 기르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지고 게임중독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해 낸 생각이 고작 아이를 팔아 게임비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돈이 부족해지자 ‘팔기위해’ 셋째아이까지 임신했다는 것이다.

이 막장 부부의 행각은 결국 이웃에 있는 사람의 신고로 발각 되었는데.. 잡힌 부부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당초 아이를 기를 생각이 없었다.. 그저 도박자금을 마련해 줄 좋은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해 주변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것도 자식의 부모로써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럴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개인이나 집단이나 심각하게 빠져있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기주의병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이면 개인.. 집단이면 집단 이 이기주의의 병에 걸려 넘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 갔더니 마을 곳곳에 ‘우리지역에는 고압선이 절대 통과하지 못한다’ ‘고압선 설치 결사반대’ ‘주민생계 파괴하는 시당국은 각성하라’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마 도시계획에 따라 고압선이 그 지역으로 통과되도록 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데모를 시작한 것입니다. 고압선이 일단 통과하게 되면 마을 전체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희들이 사는 이 원구는 전선이 지상에 없고 지하로 뚤려 있어서 미관이 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런데 고압선은 지하로 묻기가 힘든가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 노출시키는데 이 고압선이 인체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사람들마다 모두가 자기 동네는 고압선이 들어 올 수 없다고 꺼리는 것을 봅니다. 물론 저라도 내가 살던 부모님이 살던 그런 곳에 고압선이 들어오면 기분이 좀 찜찜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원활한 전기수급을 위해서는 송전탑 같은 것을 세우기는 세워야 하고.. 이 선이 어디론가는 통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모든 지역마다 조직적으로 반대를 해댄다면 어디에 설치를 하며 전기는 어떻게 공급합니까? 통과하긴 하더라도 해롭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무조건 안된다고 합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얼마나 팽배해져 있는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KTX가 통과하는 구간인 천성산에 도룡뇽이 없어진다고 이 산에 있는 스님과 환경단체가 연대를 해가지고 단식을 하면서 공사를 24차례나 방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사를 지체시킨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터널을 지어도 도룡뇽이 없어지기는 커녕 멀쩡히 그대로 서식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한사람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기심 때문에 나라의 국책사업이 1년이 넘게 지체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 이런 것 뿐입니까? 개인이면 개인 단체면 단체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이기주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구하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 남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주변에 이타적인 사랑이 얼마나 있나요? 회사면 회사, 단체면 단체, 심지어 교회에 조차 이 이타적인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람이 이기적인 이유>

대부분의 사람은 남의 유익을 생각하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체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 가족, 내게 속한 사람,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항상 생각의 중심은 타인이 아닌 나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고 나라가 있는 것이지. 내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회심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심어준 본성이 그대로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는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할 필요 없다!! 너 자신만 보면 된다.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 자신만 생각하고 상대방은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도 필요 없다. 다른 사람도 필요 없다... 너 자신이 최고이다”

이렇게 태초에 심겨진 이기적인 마음이 타락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우리 성도 가운데서도 이런 이기심은 쉽게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오늘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고린도 교회 안에도 이런 이기심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모여있는 교회 안에도 남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구하므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우상의 재물을 먹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여러분, 우상의 재물을 먹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도가 제사밥을 먹는 것을 어떻게 보시나요? 답 부터 말씀드리자면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 이럴 때는 먹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의 주인이 제사음식을 맛있게 차려서 내 놓았습니다. (그 주인은 제사음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 않고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것에 대해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이 “이 음식은 제사음식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음식을 내 놓는다면 조용히 사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그 자리에 있다면 우상제물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실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불신자라도 나로 인해 그 사람이 실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 목사도 제사음식을 먹네... 제사는 안지내면서 제사음식은 먹어도 되나봐!!” 그러면서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우상의 재물을 먹고 마실 권리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무엇을 먹거나 마실 때 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데 뭘 먹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음식을 먹으므로 상대방이 실족케 될 경우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인이 되었는데 뭐든 못하겠습니까? 비싼 옷을 입고 오면 어떻습니까? 값진 보석을 걸치고 온다고 죄가 되겠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삐까번쩍한 차를 뽑아서 타고 다닌다고 그것이 잘못 이겠습니까? 호화로운 저택에서 산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루 식사를 보통사람 한 달 봉급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잘못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하지만 이 자유가 형제를 실족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5:13] 말씀에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노릇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공동체 안에서 나를 바라볼 줄 아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공동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나 혼자 신앙생활 한다면 그런 것 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이기에 항상 내가 아닌 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일련의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8장 9절 말씀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9장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나는 자유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치를 좀 보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함으로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0장 23,24절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죄짓는 것 빼고 모든 것이 가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가 하는 이 일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 교회의 덕을 위한 것인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랑 성경의 예1 - 요셉이야기>

성경에 보면 요셉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요셉은 성경에서 흠이 없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비 야곱을 보면.. 요셉을 향해 큰 실수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여 그녀를 얻기 위해 14년을 봉사하여 얻은 아내 라헬에게 늦갂이로 요셉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이 요셉에게 유달리 애정이 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정 때문에 다른 형제들 틈 속에 요셉만 편애를 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고 말합니다. 아비로써 사랑하는 아들에게 특별 대우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떡 하나 덜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더 좋은 옷을 입혀 준다고 나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비 야곱은 자기 사랑의 표현으로 채색옷을 지어 입혔지만 요셉에게는 그것이 도움이 되었느냐? 아닙니다. 요셉은 이런 편애로 인하여 형의 원성을 싸게 되었고. 결국 형들이 시기하여 요셉을 죽이려 하고 외국 나라에 팔아버리는 빌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형들이 얼마나 손해의식을 느꼈으면 요셉을 잡자 마자 그의 채색옷을 벗겨버립니다. 더 이상 차별하는 것 꼴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도 말하지 않지만 야곱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마음에 두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나와 관계된 그 사람에게만 사랑이 가고, 애정을 쏟습니다. 내 조직, 내 목장, 내 기관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교회는 그러면 안됩니다... 교회는 나와 너 차별을 두어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세상은 차별합니다. 사장은 자기 사람만 중용합니다. 코치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경기에 뛰도록 합니다. 연줄이 없으면 제대로 일도 못합니다. 진급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절대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합니다. 모두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공동체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관련된 사람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카페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희교회는 무슨 일을 하든 ‘내’라는 틀을 깨트려 버리십시오...

‘교회’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십시오. ‘우리’라는 틀속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것이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기적인 사랑의 예2- 아간>

성경에 보면 이와는 조금 또 다른 유형이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해친 또 다른 좋은 교훈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당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여리고까지 정복 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옆에 붙은 아이라는 곳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패배를 당합니다. 백성들은 간담이 녹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나아가 왜 이런 일이 그들에게 발생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패배의 원인을 진단해 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조사를 해보니 갈미의 아들 아간이라는 자가 여리고에서 약탈한 제물을 몰래 빼돌려 숨겨놓은 것입니다. 이 물건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인데 아간이 아무도 모르게 좋은 것을 숨겨둔 것입니다.

결국 이 한 사람 아간의 욕심으로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공동체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아간은 공동체 안에서 물질을 가지고 싶어도 참았어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전체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 물건 좀 취해 얼마나 덕을 보겠습니까? 순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공동체 전체에 그렇게 큰 화를 가져올 줄은 이전에 미쳐 몰랐던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아간과 같은 자의 교훈을 본받아 교회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남은 어떻게 되든지 내 한 몸 잘되면 되지 뭐!!’ 이런 이기적 마음을 가진 자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상처를 많이 입나요?

제가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전통이 그렇게 깊은 교회는 아니었지만 성도들이 참 순수하고 마음이 정이 많은 분들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전에 있었던 중직자 한분 때문에 큰 상처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떤 상처였느냐 하면 그분이 사업을 하느라!! 이곳저곳에서 보증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래도 교회 중직자가 하는 일인데... 그러면서 순진하게 너도나도 보증을 다 써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업이 잘 될 때야 문제 없지만 어디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대로 잘 풀리나요. 이 분이 사업을 하다가 크게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피해가 고스란히 보증서신 성도들에게 다 돌아간 것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갔을 때는 이미 그 사건이 1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까지 보증서서 진 빚을 못 갚아 길러놓은 아들이 벌어들인 월급으로 그 빚 갚고 계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가 그 권사님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지... 어떻게 뭐로 위로를 해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금전거래, 보증서는 것 이런 것 하면 안됩니다.

교인들 두고 사업한다든지 장사속을 챙긴다든지...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내 것을 내어 놓는 곳입니다. 내 이익을 챙기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나의 은사, 나의 재물, 나의 시간, 나의 몸 나의 마음을 드려 섬기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지 섬김을 받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곳이 아니에요.

 

<자신을 주신 예수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의 모습 속에 당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이 있으셨나요? 이기적인 사랑이 발견됩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순간까지 당신을 위해 사신 것이 아니라 오직 죄인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철저히 우리를 위한 구원자 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되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7절에 나오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지체와 형제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형제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면 됩니다.

사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욕심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 욕심을 없애는 길은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라”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제목이 ‘내려놓음’이더라고요.. 내려놓으니 하나님이 역사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왕처럼 된다면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기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종이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워 종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이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빙점으로 잘 알려진 미우라아야꼬씨가 이름이 알려지기 전 일화입니다. 그녀가 무명작가였을 때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해서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를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오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친절히 봉사한 결과 점점 장사가 잘되었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와야 할 정도로 가게가 너무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자기 아내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운 마음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지만 이 주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다 어려운 사람들인데 우리만 잘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남편의 말을 듣고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내 잘되는 것만 알았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장사를 바꿨습니다. 자기의 가게의 물건을 줄일 뿐 아니라 어떤 물건은 아예 갖다 놓지도 않았답니다. 그렇게 하여 손님들이 없는 물건들을 찾을 때에는 그 물건은 저 가게에 가면 있습니다 하고는 손님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나 자신의 유익만 구하지 않고 전체의 유익을 구하는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요?

이렇게 하고 나니 이 미우라아야꼬 여사에게는 시간이 좀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틈틈히 펜을 들어서 글을 썼는데 그래서 완성시킨 작품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소설이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자신을 비어 종의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은 그녀를 더 아름답게 사용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 아닐까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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