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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운영자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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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장4-7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지난 홍수 피해>

지난 주에 저희 나라 수도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도 수방대책이 잘 되어 있는 서울 한복판이지만 위에서 쏟아붓는 비에는 인간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떻든 빨리 수해를 떨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줄 믿는다.

이런 나라의 위기가 닥쳐오면 정치권은 항상 이 일이 누가 잘못했니? 그러면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려 합니다. 그런데 시간당 100mm가 넘는 기습폭우가 쏟아지는데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천재지변을 만나면 어떡하든 힘을 합하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국민은 그런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뿐 아니라 성도는 항상 천재지변 가운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환란은 없다!!” 이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역사가운데 항상 환란이 닥치는데 하나님의 뜻이 없는 환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저는 강남 한 복판에 물폭탄을 내리신 것은 이 나라와 한국 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땅이 강남 아닌가? 의식수준도 가장 높다고 할 수 있고 자존심도 강한 동네가 강남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에 물폭탄을 내린 것입니다. 경고의 메시지이다. 물질주의에 만연되어 가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라고 본다. 교회 본연의 사명을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건물만 키우고, 성장 지향주의로만 가지 말고 이 땅과 세상을 향한 제사장으로써의 사명을 다하라는 경고입니다. 사실 그것은 강남사람들만을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전체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아카페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카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카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나요?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이 사랑을 생각하며 저의 부족함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이 아카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진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지혜로운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성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기억하며 지켜 행하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여러분이 아카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아카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래 참는 사랑을 하십시오. 한번 오래 참아 보십시오.. 거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치료와 회복이 있습니다.

온유해 보십시오.. 거칠고 폭력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친절과 부드러움이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남을 투기하며 질투하지 마십시오. 시기와 질투는 관계를 파괴시키는 주범입니다.

자랑하지 마시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교만은 폐망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사람이 되든 하나님을 내세우지 나를 내세우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을 내세우기 되면 여러분은 자기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오늘은 아카페의 여섯 번째 교훈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한다면 예의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면 허물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서로에 대한 존경에서부터입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존중히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의 예의바른 사랑>

부부끼리는 너무 가깝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무례한 사랑을 하기 쉽습니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줘야 사랑이 지켜집니다. 말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고요, 약속도 더 잘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분명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겁이 나이까 부인 사라에게 당신은 내 누이라 하시오... 결혼을 숨기고 누이동생이라 말합니다. 부인을 지켜줘야 하는데 자기 한몸 살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이 일 때문에 아브라함이 큰 낭패를 당할 뻔 합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이라도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환란을 당할 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가정은 사랑하기 때문에 허물도 부끄럼도 없는 곳입니다. 내복이나 속옷 차림으로 다녀도 괜찮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해도 좋습니다. 헝클어진 머릿결을 하고 눈에 눈곱이 끼어 있어도 좋습니다. 세상을 살며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위장하고 살아갑니까? 그 게 얼마나 피곤해요? 가정은 그 모든 허물이나 용납되어야 합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정일지라도 지켜야할 도가 있습니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예의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싫어하고 기분 나빠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컨대 부부간에 싸움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친정이나 시댁에 대한 모욕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흔히 부부간에 말다툼하다 “당신 집안은 다 그래!” 하고 말을 내밷을 수 있는데 이는 예의를 벗어난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대한 모독은 자기 인격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가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싸우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이 선을 지켜주는 것 이것이 예의입니다.

 

<부모의 무례함>

부부사이에 이렇게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향해서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효’라고 그럽니다. 효는 인륜지대본입니다. 인륜의 가장 기본입니다. 성경에도 이 효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 및 웃어른에 대한 예를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영의 부모 되시는 하늘 아버지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편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자식들의 예 못지않게 나타나야 하는 부모의 예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 부모님들이 간과하기 쉽기 때문에 한번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내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무례히 행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러분, 자녀를 기르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그런데 나는 애지중지 최선을 다하여 자녀를 기르는데 우리의 자녀는 부모의 그 마음은 몰라보고 노여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식에게 모든 사랑을 다 쏟아 부었는데

자녀는 부모를 향해 반항하는 거여요...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녀도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의 인격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내 마음 먹은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그런데 진짜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 자녀는 내 뜻대로 창조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가서 아들과 조카들을 대동하고 함께 식당을 갔었습니다. 그 식당은 한식 중식이 따로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조카하나가 냉면을 먹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대다수가 짜장면과 탕수육 짬뽕을 먹고 싶다고 그래서 중식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녀석이 시무룩하게 짜장면도 안먹고 탕수육도 안먹는 거여요. 다른 아이들은 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 짜증을 내면서 음식을 하나도 먹지도 않고 울상이 되어 있어요. 저희들은 1층에 있는 ( )를 안태워줘서 그러나 싶어 식사하고 태워준다고 그래도 막무가내여요.. 결국 다른 사람들은 음식을 다 먹고 내려갔는데 그때까지 음식을 한입도 안댓어요. 저도 이제 화가난 거여요. 그런데 다른 사람 다 내려가고 나서 왜 그랬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애가 하는 말이 냉면이 혼자 먹고 싶었다는 거여요. 그런데 조카도 먹고 싶었지만 그는 빨리 포기를 했고,, 이 아들은 조카 먹고 싶다고 그랬을 때 자기도 먹고 싶어 손은 들었는데 말은 못하고 혼자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던 거여요.. 그래서 제일 비싼 돈 주고... 냉면을 시켜서 먹여주고야.... 그날 기분이 풀렸어요.

 

여러분, 우리의 자녀가 노여워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언제 노합니까? 자기 인격이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입니다. 특히 학생들은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선생이든 부모든 반항하게 됩니다. 아이도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나름대로의 논리와 생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울 때도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하쟎아요.

그러나 부모는 이런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합니다. 자녀는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모든 정성과 희생을 쏟았고, 또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랑을 자녀들은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의 70%가 부모를 미워한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문 통계에 의하면 자기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설문에 부모들의 99%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통계 조사에 응한 부모의 자녀들에게 “네 부모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33%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66%의 차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 원인이 무엇인가? 부모의 무례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녀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이 있는 인격체입니다. 인격체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가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을 잘 양육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책임이 부모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칼릴 지브란은『예언자』란 책에서 부모의 소유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나왔을 뿐 당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비록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소유된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생각들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의 몸을 머물게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미래의 집에 살고 있으며,

당신은 꿈속에서조차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지만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생은 뒤로 돌아가거나 어제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 애정을 쏟는 것은 좋지만 무례히 행치 마십시오.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 기르시고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예의바른 사랑>

저는 우리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참 예의바른 사랑을 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분명 화가 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기대를 가지고 만든 인간이 자신의 말씀을 한 순간에 거역해 버리고.. 에덴동산을 완전히 망가뜨린 인간을 향해 마음도 상하고 무척 화가 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자녀들이 큰 기대를 가진 부모의 말을 한 순간에 거절해 버릴 때 얼마나 화가 나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화를 내시기보다 대화를 하세요.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 있는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말을 거십니다. 아담이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하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네가 따먹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아담이 여자 핑계를 대자 하나님은 이번에는 하와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번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뱀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자초지종을 따지기 전에 화부터 내고 보는 우리들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물어보시고 그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아무리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변명과 사정을 듣는 것. 이것이 예의입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욥기는 욥이 받는 고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 42장이나 됩니다. 한마디 말씀도 엄청난데 42장이라는 분량을 욥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은 할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요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설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온 탕자비유를 봐도 그래요,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 예의바른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가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15:12)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로서는 내가 죽거들랑 가져가라 하며 거부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둘째를 호적에서 파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비록 무모해 보이고 또 둘째가 재산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마음에 이런 독립의 결심이 선 이상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막다가는 다른 엉뚱한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아무리 망나니일지언정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그 누구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만이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미천한 자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의입니다.

 

주변에서 보면 존경받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특징은 아래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예의 바르게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이나 위치 모든 연배로 보아도 한참 어른이신데도 아래 사람들을 향하여 깍듯이 존칭어를 써줍니다. 내 위치에서 이 정도 존경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그런 태도가 아니고 작은 친절이나 존경에도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작고하신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어떤 분에게 들은 간증인데 이 한 목사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신보다 수십년이 차이나는 후배들을 향해서도 항상 깍듯한 존칭어를 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것 연습 많이 하려는데 그것이 참 잘 안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무례함>

고린도 교회에는 무례함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무례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거의 매일같이 가정교회에 모여서 떡을 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모일 때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먹을 음식을 싸가지고 왔습니다. 부유한 자는 많이 가져왔고, 가난한 자나 일터에서 오는 사람은 음식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음식을 다 함께 나누는 것이 초대교회의 성만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 어떤 부유한 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먼저 성만찬을 먹었습니다. 이들은 취하도록 먹었고 또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었기 때문에 늦게 온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했습니다. 먹는 것에서 소외되는 것보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단호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3) 사도 바울은 이들의 무례함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예의 없는 짓이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무례함의 결과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엄숙함이 훼손되었고 그 때문에 병들고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1장 29,30절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예수님의 경고 대로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고린도 교회는 먹는 것에 예의를 지키지 않음으로 작은 소자들을 실족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 이렇게 처방을 내립니다. 11장 33, 34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가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교회 안에서도 조심할 일입니다. 내가 한 무례한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 때문에 사람들을 실족케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의바르다는 것은 사람의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와 무례함>

또한 우리가 진리를 주장할 때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리 옳은 것도 무례한 형식으로 주장되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폭력으로 강요한다거나, 진리를 비난하는 형식으로 주장하면 그것은 진리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사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아무리 자기 주장이 옳아도 남을 비방하고 깍아 내리는 자세는 지양해야 합니다. 무례한 것입니다. 남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보지 않는 사이버공간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요즘은 인터넷의 댓글이나 비방성 글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칼로 벤 상처보다 말로 벤 상처가 더 오래간다고 그랬는데 연예인들 가운데 이런 악성 댓글 때문에 오래 동안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내 주장이 옳아도 우리는 상대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예의를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가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전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교회 집사님들이 제자훈련을 마치고 버스를 탔습니다. 비좁은 버스공간에 자리가 두 개 생겼습니다. 여 집사 한분이 잽사게 한 자리에 앉더니 한 자리에 가방을 걸치고는 김 집사 자리 생겼어!! 빨리 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장면을 보았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는 집사 장로 목사라는 이런 칭호가 진짜 영광스러운 칭호지만, 진짜 바깥에 나가서까지 사용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이 칭호가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런 이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 자리에서 찬송소리가 나오고 기도소리가 나오고 성경말씀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거의 옆 자리에 다 오픈된 공간이었어요. 우리는 교인이었기 때문에 다 이해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거기서 덕스럽지 못한 말들이 흘러 나온다면 그리고 만약 그 장소에 불신자들이 앉아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진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바깥에서 모임을 가지던지 예배를 드리더라도 할 수 있으면 소리가 새 나가지 않는 공간에서 예배 드렸어면 해요!! 우리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아무렇게나 믿어도 천국만 가면 되고.. 어떻게 믿던 복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신앙입니다.

가장 위험한 신앙습관입니다. 그것은 자신만 망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영광도 가리는 신앙입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자... 성경 어디에 우리가 아무렇게나 믿어도 된다고 말하나요?

바울을 빌립보 교인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러분 함께 한번 따라해 봅시다.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러분 오늘 집에 돌아가면서 물어보셔야 합니다. “나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는가?” 사랑은 무례를 행치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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