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 운영자 | 2011-08-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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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하나님의 힘> 저는 가끔씩 아들과 팔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항상 처음에는 이기는 척 하다가 나중에는 제가 져 줍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버리면 재미없어 집니다. 그리고 두 아들 녀석은 지게 되면 울어버립니다. 첫째는 괞찮은데.. 둘째 아들 녀석은 승부욕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형에게도 이겨야 하고 아빠에게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상황이 종료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복잡해져 버립니다. 그런데 한 20년이 자나서 제 아들 녀석과 팔씨름을 하면 아마 제가 져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힘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힘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능력의 팔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 이 고백이 평생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버지의 힘도 변하고, 내 힘도 변하고, 나를 도와 주는 힘있는 사람의 힘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의 힘을 내 힘으로 삼고 살을 때.. 다윗처럼 죽을 때까지 늙고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늙어도 롤 모델로 삼고 싶은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복받은 인생인데 실수하고 넘어지고 자빠졌어도 그는 죽을 때까지 복받은 인물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노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대상29장 28절) 처음은 존귀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잘 믿다가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진짜 복된 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힘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힘은 기도할 때 내게 옵니다. 기도가 능력인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그날 아침에 일어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수술 하시고 나서 아무꺼나 못 드시는데 아침에 일어나시자 배가 아프시다고 하시는 겁니다. 속이 좋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님 배 위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해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배 통증이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기도가 무모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이 기도 가운데 옴을 믿는 자입니다. 또 하나님의 힘은 말씀을 묵상할 때 내게 옵니다. 말씀이 능력인 것입니다. 하루 종일 TV만 봐 보십시오.. 머리만 아픕니다. 그러나 매일 성경을 한 시간씩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삶이 천국이 되고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또 사랑이 능력입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바보 같지만 거기에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또 아가페 사랑은 온유합니다. 성도는 어떤 일 가운데서도 친절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부드러움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비행기를 타면 대부분의 사람이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스튜어디어스들이 얼마나 친절과 따뜻함으로 섬기는지 모릅니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친절도 기분을 좋게 한다면 마음을 담아 친절과 온유를 베풀진데 얼마나 놀라운 힘이 있겠습니까? 또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 질투는 사랑이 아니고 마귀적입니다. 또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사실, 자신을 알면 뽐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가다가 지진한번 일어나니까 두려워 벌벌 떨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참고 참으셔서 망정이지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한 나라, 한가정, 한개인이 망하는 것도 잠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뽐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 교만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자랑’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자랑 다음에 교만이 나오는 것은 자랑의 뿌리가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단어가 고린도서에 집중적으로 다뤄진 것으로 보아... 이 교회에 교만으로 인해 문제가 많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식의 교만입니다. 고전8장1절에 바울은 우상의 재물을 먹는 사람을 판단하는 문제를 두고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요.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내가 조금 안다고 다른 사람을 비교한다든지...격하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조금 안다고 “무식한 것들이!! 배우지 못한 것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 속에 얼마나 큰 교만이 담겨 있는지 몰라요. 사람은 많이 배울 수록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진짜 겸손한 박사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그러쟎아요.. 영적인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지식이 생기면 생길수록 우리는 더욱 더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겸손해 져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남이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을 많이 가진 교회였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단기간 안에 많은 은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법도 잘 알았고, 말씀의 지식에도 해박했습니다. 은사도 넘쳐났고, 충성도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으로 승화되어 나타나면 놀라운 Power 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교만의 근원이 되고 문제의 근원이 되어버립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나 빌립보 교회는 이 신앙적 지식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화시킨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나타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러지를 못했어요.. 그들은 가진 영적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고 분쟁을 일삼았어요. 여러분, 지식은 정말 중요합니다. 신앙은 지식을 통해 성장합니다.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남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남을 정죄하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신앙생활 시작한지 한 3년 되면 교회 생활에 어느 정도 젖어듭니다. 기도도 할 줄 알고, 성경도 읽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 갓 신앙생활한 사람을 향해 ‘어떻게 저것도 못해... 저렇게 행동할 수가 있어’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교회는 내가 안다고, 내가 경험했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곳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경험한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이 바로 롤모델입니다. “성경을 알면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말해 줄 모델이 필요합니다. 고전 4장6절 말씀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아볼로가 신앙의 본이 되어줬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과 아볼로는 누구에게서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았겠어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빌2장5~8절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 겸손과 섬김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닙니까? 바울과 아볼로는 이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본받아 실천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이 되어 주신 것처럼,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 준 것처럼, 이런 본이 되어 주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심령이 가난해 지며.. 말씀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 지는 본이 되십시오.. 신앙이 무러익을 수록 다른 성도를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십시오. 롤모델을 삼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난 주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읽은 책 안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져 있었다... 어떤 목사님이 본인 교회 성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교회는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데 개척 10여년 만에 1만 3천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주일날만 되면 주차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 이 주차장에 주차요원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추운데 외부에서 차량을 안내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주차요원으로 거의 주일을 빠지지 않고 섬겨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어느 날 뉴스를 보는데 그 중 한분이 은행 채권단 협상을 하는 한국 대표분으로 앉아 계시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진짜 잘나가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신앙은 섬김이요. 낮아짐임을 알게 되니... 주차요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이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이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는 많은 영혼을 알고 있다... 은혜의 교회는 이런 자를 통해 아름답게 세워져 갈 줄 믿습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신앙은 겸손의 자세 가운데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우리에게도 복이 옵니다. 난 체하고 뽐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과 맞서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반드시 멸하십니다. 솔로몬 임금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웃시야이 있습니다 이 왕이 통치할 때 유다의 국력은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웃시야는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그는 블레셋 족과 아라비아 족을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 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습니다. 전군에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를 마련해 주었고 활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무기를 기술자에게 고안시켜서 예루살렘 성 망대들과 성 귀퉁이마다에 설치해 놓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 분열 이래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순간 교만 방자하여 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제단에 분향하는 일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대사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고 말합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분향하는 일은 선별된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이 할 일입니다. 이 성소에서 나가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웃시야는 화를 내었습니다. “아마, 내가 왕인데 감히 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 아십니까? 여호와의 전 앞에서 문둥병이 그의 이마에 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웃시야 왕은 문둥병자로 여생을 별궁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 후로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대면하여 설 수도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교만하니.. 그가 쌓아놓은 부와 귀를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병을 앓다가 인생을 마치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디 웃시야 왕 뿐입니까? 성경은 흥한자와 망한 자의 기록이 진솔되게 기록되어 나옵니다. 흥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망한 자의 특징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 시 75:4~7절 말씀을 보면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합니다. 이 말씀이 진리가 아닙니까? 누가 높이시며 누가 낮추십니까?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높은 체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을 누가 높이십니까?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참 겸손하다가도 좀 잘 나가고 성공하면 교만해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메달리다가 조금 돈도 잘 벌고 세상적인 성공도 맛보게 되면 하나님 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새벽기도 그렇게 잘 하시던 분이 성공하고 나면 새벽기도도 안합니다. 주일도 수시로 빠집니다. 여러분,,, 따라해 봅니다. “높아지는 것은 평생이지만 낮아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 진리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열심히 하고 여러분이 수고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끝까지 쇠하지 않고 흥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드립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다니엘서에 벨사살이라고 하는 바벨론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벨사살의 아버지는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가장 흥왕한 시기로 이끈 엄청난 힘과 권세의 왕입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였으며 엄청난 수의 사람을 포로로 사로잡아 종으로 부린 왕입니다. 다니엘 초반부를 보면 이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통치할 때 얼마나 마음이 높아졌는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풀무불 속에 던져넣는다고 온 바벨론과 바벨론 통치하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곳 자신에게 절하라는 의미와 똑같습니다. 이에 우리가 잘 아는 바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신상에 절하지 않고 신앙절개를 지킵니다.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이 노발대발하며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이 세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만 하나님이 딱 막으시니.. 죽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통치 자리에서 끌어 내여 7년 동안을 들짐승과 함께 지내며 들의 소처럼 풀을 뜯고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결국 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상천하지에 높임을 받을 유일한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벨사살은 그 부친이 교만하여 그렇게 큰 화를 당하였음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이 되자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벨사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다니엘 5장 22절,23절 - “22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우상을 높이며 찬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손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씁니다. 그 글이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전혀 뜻하지 않던 현상이 나타나 글을 쓰기 시작하니... 벨사살이 술을 먹다 말고 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 떨립니다. 이 글의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저울에 달아보니... 함량 미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날이 함량미달이어서 다 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통치한 나라를 다른 나라에 넘기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날 밤에 하나님의 채찍이 임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몰아 닥쳐서 대바벨론 제국은 하루아침에 망하고 그는 전쟁에서 불에 타서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교만에 대해 살펴보지만 사실 교만 가운데 가장 큰 교만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교만입니다. 한 두번 우쭐거리는 것은 사람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교만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교훈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교훈을 무시한 채 내 식대로 살겠다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교만입니다. 마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섬기는 영으로 명 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싫고 내식대로 살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타락하고 만 존재가 바로 마귀 아닙니까? 그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마귀의 유혹에 하와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죽을까 하노라!!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어!!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자기 식대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하와의 대답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네가 죽지 않을 거야!! 그것을 먹게 되면 하나님처럼 될수 있을거야!!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그 결과 인류에 모든 사망과 저주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타락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교만된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이 교만이 오늘날도 우리를 파멸케 합니다. 제 조카가 올해 중3입니다. 이 애가 사춘기가 와서 누님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착실하던 아이가 중학교 들어오면서 이친구 저친구 사귀더니 학교성적이 완전히 곤두박질쳤습니다. 학교성적 뿐 아니라 하는 행동도 부모님이 이해되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나타나는 결과는 좀 심각합니다. 이 아이가 하도 부모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길래 이번에 한국에 가서 상담을 좀 했습니다. 자연스레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아이가 가진 가장 큰 문제를 보게 되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주일학교부터 매주 한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참석하고 수련회도 참석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만큼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무척 심각한데 그것을 모르는 거여요. 부모님 한테는 공부한다고 하면서 몰래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할 짓 안할 짓 다 하는데. 거짓말도 쉽게 하는데... 그래서 제가 말해줬어요... 네가 교회만 착실히 다닌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행위의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신앙이 좋다고 할 수 있느냐? 이 조카와 대화를 나누면서 솔직히 저 자신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과연 나는 믿는 사람으로써 행위의 열매가 있는가? 나는 목사로써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행위의 열매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냥 주일 하루 지키는 것으로 신앙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마치 안전핀과 같습니다. 그것을 하면 신앙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마취제와 같을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이래도 주일은 빠져먹지 않고 지키는데... 그러면서 마치 대단히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교만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없으면서.. 형식에 치우쳐 살아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요 교만인 것입니다. <세대계승>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위기가 무엇입니까? 비판은 있는데 성찰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찰이 없다보니... 은혜가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합니까? 그런데 성찰이 있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 감격이 감사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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