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투기(질투)하지 않습니다. | 운영자 | 2011-08-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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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우리는 사랑의 기술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감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카페의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카페는 우리가 평생을 통해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통해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래참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카페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오래참지 못하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따듯합니다. 친절합니다. 부드럽습니다.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에게만 친절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거저 친절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울 때 우리는 아카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6일에 저희 나라 강원도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계최국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3수 끝에 따낸 승리라 그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컸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뿐 아니라 대통령을 위시하여 기업인 스포츠선수 등 관련된 분들이 불철주야 수고하여 따낸 결과입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 세계 빅 4스포츠를 모두 유치한 나라는 세계에서도 우리나라를 제외하곤 4개국 밖에 없다고 합니다. 명실상부한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지요.. 이런 국가 경사에 대해 세계 언론들은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힘이다’ ‘대한민국은 역시 대단한 나라다’며 3수만에 일군 승리를 앞다퉈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웃나라 일본만은 그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언론과 네티즌반응을 보면... 평창이 혹시 평양은 아닌가!! 한국에 눈이 오기는 하는거야!!라든지..뇌물로 IOC위원의 표를 샀다든지... 심지어 북한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이런 반응까지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20년 하계올림픽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로써 우려를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이웃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에 대해 일단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역시 일본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일본의 이런 반응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면 안되요!! 그것은 아카페가 아니에요. 같이 질투하고 비방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아카페가 아닙니다. 일본이 저렇게 나와도 우리는 일본이 하계올림픽 계최지로 선정될 수 있도록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지진과 원자력 피복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카페여요.. <투기의 의미> 오늘 본문에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투기’라고 그러니 부동산 투기를 연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투기는 부동산 투기가 아닙니다. 이곳에 나오는 투기는 희랍어로 ‘젤로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젤로이는 긍정적 의미로는 열렬히 끌어 오르는 감정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 질투하시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또한 이 단어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 다른 사람의 성취나 성공에 대해 느끼는 격렬한 부정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타인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거나,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했을 때 괞히 배 아파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사면 배 아프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 부정적인 의미의 질투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love does not envy, does not jealuos’라고 나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투기의 예> 여러분, 이 투기가 얼마나 우리 인생을 파괴시키는지 모릅니다. 먼저 이 투기는 나 자신을 무참히 파괴합니다. 질투의 마음이 어디서 생길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이 질투는 비교의식에서, 자기 열등의식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우월한 감사와 찬양이 있는 사람에게는 질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꾸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 열등의식이 생기게 되고... 열등의식이 생기면 질투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여요.. 물론 모자라기 때문에 부족하기 때문에 (겸손해져 가지고)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성취를 이루는 곳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진짜 시골 시골 골짜기에 산 친구 한 명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배우지 못한 부모님 밑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가 성공할 길은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참 열심히 공부를 하더라고요 결국에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어요..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좀 모자라도 그것 때문에 열등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자신을 돌아보고 분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모자라기 때문에,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고 분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열등감이 생겨가지고는, 결국 그 열등감으로 인해 남을 투기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여러분들 보시기에 교역자는 말씀 전하고 예배 인도하고 하니까 천사처럼 보이시죠? 그런데 교역자의 세계에서도 참 질투가 많아요. 어떤 분은 중등부를 맡고 있고 어떤 분은 고등부를 맡고 있어요... 그런데 중등부는 참 잘 나갑니다. 학생들도 부흥하고요. 교사들도 단합이 잘 되고요... 그러면 고등부 맡은 교역자는 은근히 중등부 맡은 교역자를 질투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나보다 잘 난 것도 없는데.. 왜 저래 사역을 잘해!! 선생들은 또 말도 잘 듣고.... 그냥 함께 기뻐해 주고... 자기도 한번 잘 해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되쟎아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복을 주면 자기 부서도 부흥하는 것이고, 아니면 다음에 부흥을 주시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 열등의식이 있다 보니... 그런 기다림이 없는 거여요... 그러다 보니.. 교역자들끼리도 관계가 비틀리고 사역의 불협화음이 생기고...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관계는 어떻고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서울의 어떤 큰 교회에 담임목사님 은퇴하시고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어요. 이 목사님이 한 인물 하시거든요.. 그런데 평신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아니 “우리 목사님은 왜 저렇게 키도 크고 잘 생긴거야!! 어라!!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찬양도 잘하네...!” 아니.. 목사 잘생긴 것 가지고,,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노래 잘 하는 것 가지고 뭐가 그렇게 말이 생기는지... 이 이야기 들으면서 목사가 너무 잘 생겨도 성도 시험에 빠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어요... “제가 적당히 생기고 목소리도 적당하게 나오는 것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웃고 계시지만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환경을 바라볼 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항상 비교하면서 바라보면 투기가 생기고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처음 두 아들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아들은 가인이요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하나는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고 또 하나는 가축을 먹이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들이 어느 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거둬들인 곡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어요. 왜 그럴때가 있쟎아요.. 성경에는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그랬고 가인은 믿음은 없고 그냥 형식적으로 드려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을 기분 나쁘게 여겨 가인이 동생을 향해 질투심이 생겨 나중에 동생 아벨을 돌려쳐 죽여버립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투기가 가져온 최초의 범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제사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제사를 열납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 드릴 때 그 제사를 받으시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쁘게 열납 하시지만 형식만 가지고 나아가면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면 됩니다. 아!! 이번에 받지 않았다면 다음에는 좀 더 준비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려야 겠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고, 복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패하거나 낙심된 일을 만나면, 그때는 그 일 때문에 열등의식에 빠져서 남을 투기 할 필요 없습니다. ‘다음에는 더 나은 삶을 살아드려야지!!’ 이런 생각 가지면 되는 거여요. 괞히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그러면서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 사람 때문이야!!’ 그러면서 남을 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거여요.. 하나님이 투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라!!”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고, 열등의식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다... 여러분,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생길 때, 이기심이 발동할 때 그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참된 아카페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2. 또한 우리가 알 것은 이 투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호저라고 고슴도치처럼 생긴 동물이 있습니다. 이 동물에게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저는 항상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어떤 딜레마일까요? 이 호저는 항상 혼자 사는 동물인데... 혼자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호저가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 다른 호저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다른 호저의 가시털이 자꾸 자신을 찌릅니다. 그래서 다시 혼자가 되면 또 너무 외로워 다른 호저를 찾게 된답니다. 그러나 또 가시에 찔리고는 다시 혼자가 됩니다. 호저는 평생 이것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 호저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모습과 꼭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좀 위로 받고 격려 받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어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누구에게도 마음 문을 열지 않고 꽁꽁 닫고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혼자 지내다 보면 너무 외롭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열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대인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낳게 만들기도 합니다. 투기는 대인관계를 파괴합니다. 대인관계에서 받는 많은 상처들, 힘들고 어려워하는 문제들,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곳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질투에서 옵니다. 이기심에서 옵니다. 투기라는 무기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교제를 하며 살아가지만.. 그 안에 참된 겸손과 낮아짐이 없고, 참된 위로가 없고, 용납이 없다면,,, 아무리 만나서 교제를 나눠도 헤어지고 나면 마음만 상하고 공허합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교제로 인해 받는 상처는 대부분 거기서 기인합니다. 내가 낮아지면 문제될 것이 없어요. 죽어버리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열등감 때문에,, 자존감 때문에 내가 자꾸 살아있다 보니... 자존심 상하면 화가 나고요. 지지 않으려 하고요..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는 이런 교제를 하라고 도전합니다. 빌2:1~4절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여기에 무슨 질투가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데 질투심이 생기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사울과 다윗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사울만큼 질투심 강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습니다. 수하의 가장 충성된 부하직원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고 군대장관으로 고용되고 나서 싸움을 하러 나가는 곳마다 적군을 물리치고 승승장구 합니다. 자기 부하직원이 적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왕은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리고 다윗은 사위이니 얼마나 믿을 만 합니까? 그런데 사울은 이런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다윗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털끝 만큼도 없었는데 사울은 다윗이 너무 잘하니까.. 다윗이 너무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으니까.. 마치 다윗이 자기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사울에게 악신이 들립니다. 여러분... 이게 위험합니다. 질투심은 항상 악한 영이 이용하는 단골메뉴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의 대적이 되어 무려 10년 동안을 다윗을 쫓아다닙니다. 질투심은 대인관계를 파괴합니다. 제가 한국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인데 그런데 좀 인기가 높은 드라마는 종종 봅니다. 그 가운데 자이언트라든지,, 제빵 왕 김탁구,,, 이런 드라마의 특징을 보면... 항상 바르게 살려는 주인공이 있고 이 사람을 집요하게 파멸시키려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특징은 주인공을 향한 질투심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립니다. 질투심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질투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서나, 회사에서 저 사람이 아니면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건데.. ‘왜 저런 사람이 우리집안에 태어나가지고,, 왜 저런 사람이 우리 회사에 들어와 가지고, 왜 저런 사람이 우리교회에 와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업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질투심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잘나서가 아니라,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 내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부담을 느끼고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든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질투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10년 동안이라 쫓아다니며 그를 괴롭혔습니다. 질투의 대상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투의 대상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세상에는 질투의 대상을 없애버리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질투하는 사람을 떠나 직장을 옮겨버리든지 아니면 환경을 바꿔버립니다. 그런데 호저라는 동물에서 보듯이 그렇게 옮긴다고 해서 질투가 없애지느냐? 아닙니다. 이 질투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어진다고 환경이 바뀐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을 피하면 질투심이 없어지겠지... 저 사람을 피하면 질투심이 사라지겠지... 그러지만 실제로 내가 변하기까지는 절대 질투심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울은 죽을 때까지 이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고 살면 그렇게 행복했을 한 사람을 끝까지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투심을 만나고도 탁월하게 극복한 다윗에게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장인이자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이 그렇게 극악한 질투심으로 자신을 대하고 괴롭혀도,, 자기를 그렇게 힘들게 한 그 사울을 향한 다윗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의 태도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으랴!!” 함께 합독... 이것이 투기를 만나는 우리들 누군가의 질투심을 통해 손해를 입고 있는 우리들이 그 위기를 극복할 너무나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바깥에 나가서 안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면...이런 생각을 합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저 사람 버릇을 좀 고쳐줘야겠다” 그러면서 마치 상대방을 내가 고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도 상처를 입고 나도 상처를 입습니다. 공동체 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비록 누군가가 나에게 질투심으로 질투를 해도 우리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께서 기름부은 자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으랴!!”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위해 인내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지시고 다루십니다. 상황을 다 정리하십니다. 투기하는 자.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아카페로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3. 투기는 하나님과 관계를 파괴합니다. 누군가를 투기하게 되면 절대 나의 영성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한 기도의 문이 닫혀 버립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데 어떻게 기도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저 사람 빨리 한국 안돌아가나!! 저 사람하는 사업 빨리 안 망해버리나!!’ 이런 생각이 더 들지요... 어떻게 그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투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누군가를 향해 질투의 마음을 가질 때에 그것이 얼마나 신앙생활의 독이 되는지 경험했습니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이런 질투의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같은 목회현장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질투심이 생깁니다. 그냥 생각할 때는 괞챦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질투심이 생기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축복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감사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 진심어린 기도가 되겠습니까? 4. 그렇다면 이 투기를 없애고 진정한 아카페를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나 자신이 얼마나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이 땅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온갖 죄와 사망에 빠져 있는 영혼,,,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헤메이는 영혼. 이런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오늘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나 자신의 존재가치는 남과 비교해서 매겨지는 가치가 아니어요. 하나님이 내 모습 이대로를 불쌍히 여기셨고 받으셨기에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신분이 낮아도,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우지 못해서도, 좀 허름한 집에 살더라도 절대 남을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낮은 자존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상대방을 질투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아카페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이... 남을 구원하며 살 수 있는 것이... 남을 섬기며 세워주며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투기하며 살 것 없습니다. 질투하며 살 필요 없습니다. 투기는 나를 파괴하고 이웃을 파괴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뿐입니다. 다 버리셔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주어진 환경 속에 가장 아름다운 가치... 하나님을 위해, 복음 위해 살아가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복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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