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
엠마오의 두제자 운영자 2011-04-29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07

http://szgrace.org/bbs/bbsView/124/2422916

누가복음 24장13절~ 35절 엠마오의 두제자

 

할렐루야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2대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이 두 절기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날이고, 부활절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날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종교창시자, 철학과 사상이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진리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또 공자나 모하메트와 같은 종교창시자가 있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선행과 종교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이야기하고 그 진리를 믿을 것을 말합니다 .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시어.. 죽었다가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어 우리와 이 자리에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부활은 진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도,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도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죽었고 참으로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참 믿기어 지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되는 진리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고 살아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의 본 뜻은 무시한 채 축소된 의미만을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성적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운동선수가 심기일전하여 페이스를 회복한 것을 ‘부활’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또한 봄이 오면 마치 죽었던 것과 같았던 자연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의미에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부활절이 되면 계란을 나눠먹는데 아마 계란에서 닭이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풍습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도 절반의 설명은 될 수 있겠지만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환경과 조건이 달라져서 병아리가 되었을 뿐이지 이미 계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나 소설처럼 상상으로 말하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부활은 진짜 죽었다가 진짜 살아난 것이라야 합니다” 죽음에서 소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옆에 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

오늘 본문을 보면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보며 “왜 그분이 그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했던 것인가?”를 생각하며 너무나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십시오.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들은 삼일 전에 일어난 한 청년의 이해되지 않는 처형사건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 사이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지만 그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지만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 같이 먹고 기적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참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바로 옆에 두고도 예수님에 관한 말을 계속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끼어드십니다.

 

17절을 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이들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선 이유는 그 사건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너무나 가슴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죽으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래 산 사람이 죽으면 그다지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죽으면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비교적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통을 줍니다.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했나!!’ 이것이 바로 두 청년의 갈등이었습니다.

 

계속해서 19~21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먼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근접할 수 없는,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과 관원들이 잘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로마의 식민지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해방시켜 줄 해방자를, 구원자를 기대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너무도 뜻밖의 죽음으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기대가 한 순간에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놀라게 한 ‘부활’>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갈등이 그 다음날 생겼습니다. 그것은 한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전해주는 여자들의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그들의 마음을 내내 억누르고 떠나지를 못했습니다.

 

소문은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 소문은 무시할 수 없을 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시하고 믿지 않으면 그만인데. 이 소문은 무시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의 이 소식은 듣는 자로 도저히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22절과 23절을 보면 제자들은 이런 고민을 쏟아 놓습니다.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문을 듣고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만나시고, 직접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 만나지 마시고 직접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아마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여자들이 빈무덤을 보고 기겁을 하고 뛰어왔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에 가 보았습니다. 그들 앞에 돌문은 열려져 있고 주님의 시체를 쌌던 옷이 개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의문을 제시합니다. 누가 돌문을 열었느냐? 옷은 누가 벗겼느냐?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훔쳐 갔다는 실종설을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기절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깨어나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믿지 않으려면 못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갔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온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설명하여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치못하심이 없다는 믿음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돈에 빠져 있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것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기 이 자리에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활을 믿을 수 없어서 혼돈에 빠져 있는 두제자에게 부활은 거짓이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듣고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더디 믿는 것'이 문제>

두 청년이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첫째 25절의 말씀을 보니.. ‘구약의 말씀을 더디 믿었던 까닭’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디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디 믿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을 가리켜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지능이 낮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읽고 믿었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약속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의 목적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설교도 열심히 들어야 하지만.. 말씀을 배워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예수님이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데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 말씀위에 세워질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자꾸 이해하려 들지 말고 먹어보십시오. 말씀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이 육이 되고 피가 되며 곧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먹을 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은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먼저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들어가십시오. 구약에는 예수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으로 들어가시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할렐루야!!

주님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뜨겁게 됩니다. 말씀 속에 주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식은 가슴이 불을 댕기게 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루터는 롬1:17절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이 말씀을 통해 종교개혁의 도화선을 일으키게 됩니다.

▷ 어거스틴은 롬13장11절 말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이 말씀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오며 방탕아에서 성자가 됩니다.

▷ 18세기 영국의 전도자 휫필드는 롬8장 15~16절 말씀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고 불의 사자가 됩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도 여러분과 저에게 말씀을 풀어주시므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만찬에서 만나는 예수님>

그리고 또한 30절을 보십시오.

“저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님은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더라”

두 사람과 예수님은 대화하면서 계속 걷다가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느 한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식사하시면서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나누어 줍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떡이 내 속에 들어올 때 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떡은 주님의 살이라고 말씀하셨죠!!

그것은 주님 당신을 주시는 겁니다.

즉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는 마음이 뜨거워졌고... 주님 당신을 주시니...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그곳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데는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어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셔야 하고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어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이 우리 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심으로 영의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은 부활절 깜짝 내가 기억하고 끝나는 그런 분이 아니라, 나의 삶 어느 순간에라도 찾아오시며 동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처럼 때로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을 자리라도,.. 믿음이 없이 더디 믿는 그런 신앙의 환경 중이라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찾아오시면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때로는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하여 성령으로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변화되게 됩니다. 이 엠마오의 제자들도 변화되었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십시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예수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 엠마오로 가던 그들은 가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의 방향전환이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뀝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든 인생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절망으로 한숨 쉬며 살든 인생이 희망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 만나면 인생의 방향전환 이뤄져>

여러분, 예수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면 부활의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인생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남편이 다섯이던 한 여자가 예수를 만난 후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길이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서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간증하자 이 두 사람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고민은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소문을 믿을 수 없어서 혼돈에 빠져 있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그들은 바로 이분이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여러분도 ‘나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내가 인생을 포기하고 절망했을 때, 불가능 앞에 서 있었을 때, 나를 찾아와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만 부활의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나도 보았고, 김목사만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도 믿는다고 고백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러분의 예수님, 여러분의 성령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운영자 2011.05.11 0 378
다음글 십자가의 의미(4월17일 설교) 운영자 2011.04.29 0 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