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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4월17일 설교) 운영자 201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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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1절~6절 십자가의 의미

 

<진젤돌프의 십자가>

한 장의 명화가 기독교사에 놀라운 영향을 준 일이 있습니다. 스텐버그의 ‘십자가’라는 그림입니다.

성 제롬 대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스텐버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텐버그가 그림을 그리다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끌어 그림값을 올리기 위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텐버그는 이렇게 그림을 잠시 중단한 동안 집시 여자인 페피타를 모델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화실에 와 있던 모델 페피타는 초안만 잡혀있는 예수님 상을 보고 스텐버그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스텐버그는 너무나 흔한 이야기라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소녀의 간청에 못 이겨 점심시간에 대충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페피타는 그 이야기에 몹시 감동하였고, 불쑥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 훌륭한 사람을 선생님도 사랑하고 계시겠지요?”

이 한마디가 스텐버그의 가슴에 꽂혀 몹시 괴롭히고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곰곰이 생각하고 며칠 동안 깊은 묵상에 잠긴 후에야 스텐버그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 제롬 성당에 걸려있는 십자가 그림입니다. (그림을 계속 보여줌) 그림이 완성된 뒤에 그는 그림 값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후대에 또 한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18세기 독일 복음주의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진젠돌프 백작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젊음을 바칠 것인가?’ 고민하며 방황하던 어느 날 제롬 대성당에 걸려 있는 스텐버그의 ‘십자가’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한참 바라보다가 진젤돌프는 마음속에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십자가를 위해 살아야겠다’.‘십자가를 위해 나의 젊음을 바쳐야 겠다’ 십자가 그림에 감화를 받은 진젤돌프는 전 재산을 바쳐 선교단체인 모라비안 교파를 창설하게 됩니다. (그림 감춤)

 

그리고 이 진젤돌프는 나중에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이끌었던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존 웨슬레가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대서양을 건너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송하는 한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바로 진젤돌프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있는 경건과 평안의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존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뜨거운 신앙과 전도열에 자극되어 새사람이 되었고 영국의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스텐버그와 진젤돌프 공작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삶에 대한 통찰과 회개의 계기를 마련해 준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토록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까?

이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현대를 일컬어 무감동, 무감각, 무표정의 시대라고 합니다. 분주한 세상에 너무나 바쁜 삶을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에 감동도 없고, 감각도 없고, 표정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신가요? 삶의 참다운 기쁨과 희열을 잃어 버린 채, 외로움과 아픔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보람된 인생,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진젤돌프와 같이 고민하고 있다면,,, 십자가를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젤돌프 공작을 변화시킨 십자가라면 오늘 분명 여러분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진젤돌프 공작의 삶이 바뀌고, 영국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그의 삶이 드려졌다면 우리 삶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에서 우리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인생을 방황하지 않고 바르고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두 가지를 반드시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십자가에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만이 나의 진실하고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름 석자를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요? 어떤 사람인가요? 어떤 운명인가요?

많은 사람은 이 질문 앞에 분명한 대답을 가지지 못한 채 qustion마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마 평생을 질문만 가지고 사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을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를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로마서 5:6-9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한 진노로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위의 두 말씀은 우리가 죄인임을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죄는 자기 자신과 인생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을 가려 버립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시키고 자유를 빼앗습니다. 아름답고 존귀한 자로서의 신분에서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죄는 우리를 나누고 분열하는 저주를 부릅니다. 불행의 원천이며 모든 악의 씨앗인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저주의 십자가라는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해 저주 받고 버림받은 자를 심판하는 사형 틀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는 죄인인 내가 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들은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여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실거야!!’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정치적으로 그들을 해방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 무리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환영하던 손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못박으라!! 외칩니다.

 

오늘 이 무리들 속에 누가 보이나요?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고 머물겠노라 약속했건만, 죽음의 위협 앞에 다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 속에서도 역시 나를 발견합니다.

어린 계집아이가 한 말 한마디 앞에 자기 선생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소유와 신분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부분일 뿐 전체는 아닙니다. 보이는 현상에 가려 죄인으로서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나마 자신의 실체를 맛보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언제냐? 바로 고난당할 때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동안 인격과 지식으로 위장했던 자신의 모습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저주와 심판으로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사망으로 마쳐 버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신 사랑이며, 사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운명으로부터 건지신 사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 공동번역으로 읽어봅니다 -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사53장3절~6절)

 

우리 주님은 우리의 병을 대신 앓아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대신 겪어 주셨어요.

우리의 죄를 인하여 대신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는 것 등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여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천벌을 받아 하나님께 매를 맞고 학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여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거여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들이 절규함에도, 그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면서까지 사랑하신 사랑인데도 말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아무 가치 없는 나, 나도 포기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생축으로 재물로 쪼개어지고 부서져 피를 흘리며 드려졌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그렇다면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게 되었나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죄없음의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양육반을 하면서 이 말씀을 판사의 선언문에 비유합니다.

세상은 거대한 감옥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이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판사가 ‘죄없음’이라고 선언하면 우리는 감옥에서 나와 자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에게 ‘죄없음’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댓가를 지불해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언하십니다. “예수의 피를 믿는 자, 십자가로 붙들며 사는 자는 ‘죄가 없다’고 하시는 거여요. 그것이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은혜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시므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것입니다.

 

토마스 톰슨은 말합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열쇠로 문을 열고 죄수를 자유롭게 걸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큰 글씨로 아무 빚도 없다고 쓰는 것이며, 용서는 법정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너무나 높게 그리고 멀리 활을 쏘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밖에 버려 집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배 안에 있는 게를 바다로 갈 수 있도록 풀어주는 것이며 정죄 받은 죄인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선언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와 씨름하고 있는 적수에 대해 목조르기를 풀어주는 것이며, 낙서가 적힌 벽을 깨끗하게 지워 완전히 새 벽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베푸신 용서는 이러한 용서였습니다. 이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절망 가운데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어요. 낙심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주저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망연자실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죄인으로서 가치 없는 자에게 가장 놀라운 선물을 주시고자, 환산할 수 없는 값을 치르고 계신 주님을 발견하기에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느낍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원래 내 모습입니다. 죄와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결단할 수 있고,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도 믿을 수 있습니다. 수치와 조롱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과 배신당함이 나를 위한 것이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주간 다른 것 보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묵묵히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보기 원하십니까? 저 십자가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질문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도록..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 한 주간을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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