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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바라봐야 하나요(4월3일 설교) 운영자 201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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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1장4~9 누구를 바라봐야 하나요?

 

요즘 아이들은 주로 닌텐도나, Psp 같은 전자기기들을 가지고 놀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주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자치기 이런 것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게 뭐가 재밌는지 아침에 나갔다면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놀이가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볼록렌즈(돋보기)로 종이를 태우는 놀이입니다. 돋보기에 초점이 맞춰지면 나중에 종이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 돋보기 놀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때 영적인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시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선을 하나님께 맞춰 집중하게 되면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우듯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 한눈을 팔며 살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태양이 강렬해도 볼록렌즈의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종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하나님,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데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누구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는데, 누구는 그런 역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겁니까? 하나님 편에서, 예수님 편에서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요? 하나님이 누구만 편애해서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는 믿어도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로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라고 주시는 교훈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여 큰 은혜가 임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불행한 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됩니다.

 

<마음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사건인가요? 그것은 그들이 광야의 길을 행하면서 길이 힘들고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참 힘든 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이 행하는 광야의 길에는 ‘왕의 대로’라는 크고 평탄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에돔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가지 못하고 다른 길로 삥 둘러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행하는 길이 온통 산악지대이고 비포장 지대이고 거친 땅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길을 가다가 그만 마음이 지쳐고 상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쭉 뻗어진 길을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되고 형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씩은 꽉 막힌 길을 만나기도 하고, 비포장 도로 같은 불편한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산과 같은 높은 고지를 만나기도 하고, 사막과 같은 황량한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길은 공사중이라는 푯말을 만나...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가야할 상황도 발생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중국에서 특히 중국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면 이 기다림은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짧은 시간 예배당 공사를 하면서 배운 중요한 교훈도 바로 그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어야지 일할 수 있지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이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다 보면 쉽게 낙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런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기다려야 합니다.

약속을 받았다면 약속이 이뤄지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했는데 이 믿음이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 기다림이 없는 거여요. 왕의대로로 가지 못하고 조금 거친 광야의 길로 행하게 되었다고... 약속의 장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길 가운데 마음이 상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상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상할 수는 있습니다. 저 또한 목사이긴 하지만 마음 상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저도 낙담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입술로 다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해도 마음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녹여버리는 것이지요.. 마음이 조금 상한다고 입술의 말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면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사57:19]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입술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입술의 고백대로 되게 하십니다.

이 글 앞 부분에 보면 가나안을 탐지한 12명의 정탐꾼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곳에 보면 두 부류 사람들의 각각 다른 입술의 고백이 나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갈렙은 성읍이 견고하고, 아낙자손 네피림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땅을 주셨으니 들어가서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면 된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있지만 능히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말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민14: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한대로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입술의 말이 곧 그들의 마음이요. 바램이요. 신앙이기 때문에 그대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도 그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하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5절上)이 고백을 잘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정말 심각한 불신앙이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다르게 표현하면 왜 애굽에 있도록 가만히 놔두지 우리를 괞히 건드려 가지고 이 고생 하도록 시키는가?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구원의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원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애굽 땅에서 종노릇하던 백성 아닙니까?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불쌍한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잘나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었습니까?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애굽 종살이 하면서 노예로 평생을 살다가 소망없이 죽을 백성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약속을 기억하시어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은혜도 모르고. 약속의 땅을 앞두고 인내하지 못한 채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가지고 이런 고생을 시키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감옥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을 구원하여 자유인이 되게 해 주었는데... 사회에 나와서 좀 적응하기 힘들다고 왜 나를 감옥에 있다 죄인으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괞히 구원해 가지고 이 고생하게 하는가? 이런 불평하는 사람과 똑같아요...

여러분,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요? 신앙생활 하면서 힘들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를 부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이런 일도 만나고 저런 일도 만납니다.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도 듣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교회 못다니겠다.. 이제는 하나님과 담 쌓고 살거야!! 이런 말을 하면 안됩니다. 구원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구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내 걸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는 포로수용소에서 수많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믿음 그것 하나 지키려고 죄인 취급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해요...

 

<불신의 결과 - 모든 은혜의 상대화>

사람이 한번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불평과 원망의 도구로 만들고 맙니다.

하반부에 보니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그들은 이미 식물을 먹고 있었고 물도 마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구하면 얼마든지 식물도 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맛대로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없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차도 없고 집도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게 되면 자꾸 욕심이 내 삶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 욕심이 생겨서 이것 없고 저것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 필요를 따라 구하기만 하면 주시는 분이신데 구하지도 않은 채 원망만 늘어놓고 산다는 거여요....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 신앙의 현주소 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며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나무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돌아보며 감사하고... 소원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봐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한 채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불뱀을 통한 징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런 불신앙을 보다 못해 마침내 진노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원망 불평을 늘어놓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불뱀이 몰려왔습니다. 불뱀은 등에 붉은 반점이 있어 마치 불처럼 붉은 색깔을 띠고 있는 징그러운 뱀입니다. 맹독성을 가진 독사의 한 종류이고, 한번 물리면 온몸에 즉시 독이 퍼져 고열이 나서 신음하다가 마침내 죽게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불뱀의 공격 때문에 저항 한번 못하고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뱀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당신을 향해 불신앙하고 원망하며 감사하지 못할 때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징계하심니다. 때리십니다. 당신의 백성이라도 고통을 주십니다. 불뱀과 같은 도구로 아픔을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웅덩이에 빠지게도 하세요..

그런데 이런 아픔을 만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 : 놋뱀과 십자가>

7절 말씀입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불뱀에 물려 신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원망했던 것이 잘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나아와 간청합니다.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기도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의 길을 베푸셨습니다.

8절.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불뱀의 모형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9절.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으로 뱀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을 본 사람마다 신기하게 다 살아났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의 놀라운 진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 되었고. 이로 인해 저주받아.. 불뱀과 같은 마귀의 세력이 두루 다니며 우리를 물어 죽입니다. 정죄합니다. 유혹합니다. 시험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마귀가 뿌린 사망의 독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죽음에서 구원받아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게 했고 이 놋뱀을 보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놋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놋뱀은 바로 2000년 전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1500년이 지난 이후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시면서 당신을 장대에 달린 놋뱀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예수)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추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겁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믿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허물과 죄 가운데 헤메이며 저주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높이 들라고 하신 놋뱀 뿐이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4:12) 여러분,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오직 한길 예수그리스도 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데, 그 뱀의 모형을 본다고 살아납니까? 더욱이 불뱀에 물려 죽는 사람은 그 비슷한 것만 봐도 기겁을 할 텐데 그것으로 보고 싶었겠습니까? 우리 말에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불뱀 비슷한 것도 쳐다보기 싫었을 겁니다.

만약 이들에게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절대 놋뱀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한자어 아시죠? 그 단어에 이런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信은 ‘믿을 신’입니다. 仰 은 ‘우러를 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란 말은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놋뱀을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성적 판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살아가는 바로 그 현장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9절을 한번 더 읽습니다.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높이 달았습니다. 그것을 어디다가 달았을까요? 성전 기둥에다 달았을까요? 아니에요. 그것을 지금 불뱀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바로 그 현장에서 높이 달았다는 거여요. 그곳에서 놋뱀을 높이 들었다는 거여요..

그랬더니..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 놋뱀을 쳐다보았습니다. 신기하고 놀랍게도 쳐다본 모든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죽기 일보직전의 사람도 살고, 거품을 품고 비실거리던 사람도 살고, 경기를 하던 사람도 살고 모두 살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요?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서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나요? 예수님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심판가운데 놓인 자라도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주를 섬기며 당하는 시련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쳐다보게 될 때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않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우신가요? 예수님을 쳐다 보십시오.

정신적으로 고통가운데 있나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외로움에 젖어 있나요? 말못한 상처와 아픔을 가졌나요? 예수님을 쳐다보십시오.. 여러분이 처한 고통의 바로 그 현장 속에서 우리 주님은 높이 들리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행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고통의 모든 현장 속에서도 주님은 높이 들리시고 주님을 바라볼 때에 구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만나는 인류의 이 심각한 위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까?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 속에 인간의 노력은 속수무책이라는 것입니다.

발달된 과학문명도, 무기도, 종교도... 다 속수무책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저 지진과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일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길 뿐입니다.

우리 민족, 이 중국 땅이 살 길도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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