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극복하는 법(3월27일 설교) | 운영자 | 2011-0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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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극복하는 법 (마 6:25-34)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염려라는 병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염려는 강한 자이건, 약한 자이건, 가진 자이건, 못 가진 자이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질병입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약 절반이상이 내일에 대한 염려와 노후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단 절반 뿐일까요? 따지고 보면 열이면 열 모두가 염려를 하면서 한 생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사람마다 염려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그 근본을 찾아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하는 염려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이 모든 염려의 뿌리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방사능 오염 때문에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데 일본수도인 도쿄에 까지 방사능물질, 세슘이 검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1세 이하의 영아에게는 수돗물을 마시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점쟎던 일본 사람들도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며 생수사재기 운동이 일어나고, 생수가 품절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 부랴부랴 수돗물이 성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러면서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부관료들이 TV앞에서 수돗물을 시식하는 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도쿄도지사가 수돗물을 먹으면서 마치 사약을 마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사람들이 더 불안해 하는 웃지 못할 사정이 발생했어요... 이 염려라는 것이 비단 원자력 피해를 입은 일본 사람 뿐일까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의 밑바닥에는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염려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사회가 부요해 졌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중산층이 점점 붕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가진 자들이 가족들과 한번 외식할 때 쓰는 돈을 가지고 모든 식구가 한 달을 살아야 되는 저소득층이 점점 더 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체감 물가는 점점 높아지고 있고, 사교육비는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의 목숨과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연일 자연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방사능 오염이 생겨서 혹 우리나라에까지 미치지는 않을까 불안 불안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재앙이 우리나라에는 닥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또한 우리가 머문 이 외국 땅은 항상 불안이 존재합니다. 직장이 안정된 것도 아니고, 환경이 안정된 것도 아닙니다. 지내다가 자식들이 몸이라도 좀 아프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형편에서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뭔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 염려는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팔자 좋게 최고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가 간 솔로몬 같은 왕도 인생을 돌아보며 ‘평생 근심하면서 수고하다 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염려는 인간의 실존이요, 참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 참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분 한분을 뜯어 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은데도 염려를 하지 않고 한 생을 보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염려했고, 위대한 사도 바울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염려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을 향해 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세상은 염려할 일이 널려 있는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염려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염려가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해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을 해치는 무익한 것인지를 잘 아셨기 때문에 아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왜 염려가 옳지 못한 것이며 그리고 염려를 만날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우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 가운데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염려를 이길 줄 아는 자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달려 나온 것도 세상의 염려 다 뒤로 하고 주님께로 달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함께 한번 축복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염려는 안할수록 좋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먼저 염려는 안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함께 따라해 봅니다. “염려는 안할수록 좋습니다” 왜 그러하냐 하면.. 3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먼저 첫째로 염려는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언 17:22절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여기서 심령의 근심이 뼈로 마르게 한다는 것은 뼈가 썩어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뼈가 마르고 썩어들어가는 병이라면 얼마나 치명적인 것입니까? 근심을 하고 염려를 하면 그것이 우리를 그와 같이 치명적 병이 생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도록 만들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만들 위험이 있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염려’가 바로 이런 방탕과 술취함과 맞먹는 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해봐야 소용이 없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27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성분 가운데 키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시는 분이 많으신데.. 솔직히 염려한다고 그 키를 한자나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저희 작은누나 딸이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인데 키가 얼마나 작은지 ( )cm 밖에 안되요. 부모가 얼마나 염려하는지 몰라요. 뭐 건강식품이는 약도 먹이고 운동도 해보고 별별 것 다 해봐도 안되요... 염려한다고 키를 자라게 할 수 없어요. 믿고 맡기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염려한다고 생명을 1년 연장할 수 있나요? 80살 살기로 정해진 인생이 81살을 살 수 있나요? 안됩니다. 그런 염려는 무익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는 사실에다 비유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합니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안 움직입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만 요란합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한 겁니다. 쓸모 없는 겁니다. 그걸 왜 해야 됩니까? 오래 전 일입니다. 미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감리교 목사, 웰치 감독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101세 생일을 맞게 됐습니다. 101살 생일이니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이 모여 축하하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기자들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목사님, 101살이십니다. 남은 생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되십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30년 전 70대에 은퇴를 했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부끄럽지만 목사로서 매일 염려를 끌어 안고 살았어요. 날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았는데 나중에 은퇴할 때 가만히 보니 내가 평생에 끌어안고 씨름한 것 중에 실제로 터진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터지지도 않는 문제를 놓고 평생을 씨름하면서 염려한 것이 태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염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이런 과거를 돌아보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앞날에 대해서 걱정 안 하기로 했어요" 해봐야 소용없는 염려를 왜 합니까? 그렇다면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염려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안 할수록 좋습니다. 34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너무나 좋은 말씀이지요. 내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나에게 이르지 아니한 시간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내일입니다. 아직 이르지도 않았고 내 것도 아닌 시간과 날을 놓고 걱정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신부이며 작가인 헨리 나우웬이 염려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을 섰습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혹시로 가득찬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 이뤄지지도 않은 것을 ‘혹시’로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멍청한 짓입니까? 이런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오지 아니하는 내일을 놓고 왜 그렇게 염려해야 합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가운데 유명한 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내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법> 그렇다면 이 염려를 벗어 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면 이 염려는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 믿음과 관련해 3가지 구절이 나옵니다. 먼저 첫째로 따라해 봅시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염려가운데 있는 그의 제자들을 보시며 시각자료를 이용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아도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들을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느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그러면서 30절에 말씀하시기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말씀이에요. 지구상에 있는 조류의 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새가 굶어죽지 않고 사는 겁니다.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다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미물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를 씻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들로 구속한 당신의 자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날마다 보시면서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공중에 새도 저렇게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면 염려는 힘을 잃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가 끼어 들어 와서 나를 괴롭힐 때마다 생각하십시오.. 창문을 열어 제치고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를 한참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십시오. “저 새를 하나님이 저렇게 먹이고 입히시네요. 하나님,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저는 지금 실직했습니다. 가족들이 딸렸습니다. 염려가 나를 짓밟아 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 주십시오. 너희일까 보냐의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인도해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구절은 (함께) '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32절을 보세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있어야 할 줄 아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방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어떤 면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다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이런 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을 골고루 공급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도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햇빛과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에게도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실리 있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몰려오면 길에 나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으로 이렇게 외치십시오. '하나님, 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참 건강합니다. 좋은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아는데 좋은 집에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런 사람에게도 다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알고 주셨는데 하물며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고 스스로를 다짐해 보십시오. 이전에 신문에도 났습니다만 포르노 잡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정말로 인간을 더러운 음란의 쓰레기통에다 집어 넣는데 공헌을 한 플레이보이지 창업주 헤프너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 같으면 천벌을 받아서 30살도 못 살 것 같은데 85살 생일을 맞았어요. 한때는 뇌졸증에 걸려서 다 죽어 간다 했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지금도 20대 미녀를 몇 명씩이나 데리고 같이 삽니다.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 저 보십시오. 헤프너도 필요하니까 전부 다 주시지 않습니까? 건강 주시지, 장수하게 하시지, 여자도 하나로는 모자라 7명이나 붙여 놓고 살게 하시지. 다 주시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것 다 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주신다고 믿습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십시오.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상 염려는 꼼짝 못합니다. 그 믿음이 그 염려를 묶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붙들 말씀은 (함께)“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아니해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도 시간 내서 주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며 예배할 줄 아는 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소원을 갖는 거여요...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원합니다.’ 이런 삶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의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체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 도맡아 주시겠다는 약속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와 구하라!!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다른 것 다하고 나중에 하나님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라!!는 것은 이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훈련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을 나갑니다. 똑 같은 생활이 반복 됩니다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의 태도는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아무리 바쁘고 쫓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이 스케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켜 주십시오." 하고 단 5분, 10분이라도 기도하고 일어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 이것이 영적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를 일치시키고 우리의 삶의 무게를 하나님의 나라에다가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에서 자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염려를 극복할 특효약입니다. 오늘 3가지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미물도 돌보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너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 또한 (하나님은)“너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 아시느니라”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믿음 붙들고 염려와 싸워 승리와 기쁨을 맛보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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