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
야곱의 복 운영자 2011-01-25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13

http://szgrace.org/bbs/bbsView/124/2422904

창세기 32장 22절~32절 야곱의 복

 

<365일 야곱>

야곱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둘째손자이면서 그 또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에 관한 기사도 많이 나오지만 야곱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부터 23장까지라면 야곱에 관한 이야기는 25장부터 창세기 거의 마지막 50장까지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장수로 따지면 아브라함은 13장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야곱이야기는 26장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고 해서 야곱이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대단한 삶을 살았느냐? 그의 아버지 이삭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느냐? 아닙니다. 사람의 일생을 인간이 어떻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에 관한 기사를 왜 이렇게 많이 할애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먼저 저는 그 첫 번째 이유로 야곱이 바로 오늘날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의 야곱을 보면 마치 오늘날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야곱의 이 삶이 바로 나중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벡성들의 삶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이 야곱의 이름이 신구약을 통털어 365번 등장합니다. 야곱은 곧 365일 우리의 삶이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야곱의 삶을 통해 배울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

<야곱은 욕심 많고 교만한 우리이다>

먼저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욕심많고 교만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성장환경을 보면 그는 아비 이삭의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이 ‘발꿈치를 잡은 자’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즉 남을 끌어내리고 올라가려는 그런 인생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 주자가 야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동안 항상 형 에서와 경쟁관계 속에서 형을 밟고 일어서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뜻하지도 않게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그것도 간발의 차이로)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이 그렇게 많지를 않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당시 아비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장자의 권한은 맏형에게 주어졌습니다. 자식들을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권한 또한 맏형이 받았습니다.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형 밑에서 손해만 보고 산다는 생각이 이 야곱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기회를 틈타 이런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예수를 믿어면서도 “나는 당하고는 못산다. 손해보고는 못산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성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기울여 봅니다. 그런 노력을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 방법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냐?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런 신분 상승을 위해 2가지 일을 꾸밉니다. 하나는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 팥죽으로 장자권을 산 것입니다.

당시 형 에서는 믿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장자권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 그릇의 팥죽에 그것을 덥석 바꿔치기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의 입장에서는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고,,, 야곱의 입장에서는 너무 간사하고 교활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한 몸에서 태어난 형에게 팥죽으로 장자권을 흥정합니까?

 

또 하나의 모습은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는 장면이다.

아비 이삭은 죽음이 가까워 오자 자식에게 축복을 빌어주려 했다. 먼저 맡형인 에서에게 복을 빌어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번에도 아비를 깜쪽같이 속여서 그 축복을 가로채고 말았어요.

이 장면 속에 형에 대한 야곱의 배려는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단지 “나만 잘되면 되지. 나만 대접 받으면 되지!! 나만 복받으면 되고 성공하면 되지” 하는 그런 이기적인 인간의 본심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전에는 얼마나 이기적인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야곱(발꿈치를 잡은 자, 약탈자).. 얼마나 그의 이름에 합당한 모습인가요? 성숙되지 못하면 야곱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여요..

오늘날 모기업에서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형제를 서로 고소하고 고발하는 그런 모습을 봅니다. 부모님의 재산을 서로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찣고 찢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비단 이것은 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날 나만 생각할 줄 아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야곱을 택하심>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야곱. 잘못된 욕망, 이기심으로 채워진 이런 야곱도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야곱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약점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한번 따라해 봅시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열쇠가 있습니다. 그는 벌레같은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가치없는 존재인가요? 우리 또한 야곱처럼 얼마나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존재인가요? 그런데 이런 우리를 선택하셨다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은혜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도망가게 됨>

우리는 흔히 남을 누르면 내가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밟고 일어서야지 내가 잘 될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가도 무한 경쟁 속에 남을 이겨야 내가 이길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무한경쟁 외치지만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고 그렇게 접근하면 외톨이가 되어버리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요즘은 상생관계로 가야 서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도 나 살고 너 죽자 식이 아니라 서로 잘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업도 서로 상생해야 합니다. 1차, 2차 벤드가 잘되야지 대기업도 잘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만 복받고 잘 되겠다는 생각으로 형의 가진 것을 빼앗은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고향 땅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형의 미움을 받고 먼 타국으로 쫓겨나듯 도망나오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1:15)

하지만 이런 욕심으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된 야곱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낙천주의자이십니다. 실패하고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때 시작하십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야곱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

먼저 벧엘에서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이제 혼자가 되어 외롭고도 외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야곱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바로 벧엘이라는 곳에서 그를 만나신 것이다.

28장 11절로 16절 말씀이다.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혼자서 외롭게 돌베게를 하고 자고 있는 야곱..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름대로 산다고 살아왔지만 욕심과 교만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결국 집에서 쫓겨나서 타국으로 가야만 하는 이런 상황... 이런 외톨이 야곱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이런 야곱도 우리 하나님은 외면치 않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지만은 그를 택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찾아와서 만나주실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하여 복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이 시기는 우리 인생이 광야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홀로 만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너무 흥분이 된 나머지 그곳을 기념비를 세우고 벧엘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 벧엘에 하나님의 전을 짖겠다고 약속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

그런데 야곱은 밧단아람이라는 곳에서 외국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성경에서 야곱이 외국생활 하는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야곱의 관심은 오직 돈을 버는 것. 성공하는 것이었다. 비록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서 오는 발걸음이었지만 그의 머리에는 “두고 보자 내가 이곳에서 반드시 성공해 가지고 돌아가리라!!” 이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일을 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한번 나타나 주셨지만 그것은 까마득한 옛 추억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지만.. 외국에 나오게 되면 그것은 옛추억이 되고 맙니다.

이곳에서 돈도 벌어야죠, 자식 공부도 시켜야죠? 한국에서 못했던 것도 좀 즐겨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서원 약속을 기억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야곱도 인간인지라. 그랬던 것 같아요.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그런데 삶이란 그렇게 쉽지 많은 않습니다. 외삼촌 밑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야곱은 참 많은 고생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일일이 다 살피지는 않았지만 이 20년의 세월동안 야곱이 고생가운데 그의 성격이 철저히 연단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얼마나 욕심이 많습니까? 자기만 압니까? 그런데 외국생활 하면서 자기보다 더한 사람 밑에 있으며.. 그것이 하나둘씩 꺾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교만을 다루시기 위해 본인이나 가족의 건강을 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고약한 성도나,, 상사를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왜 그런 환경을 주시나요? 하나님의 연단 때문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두신 외삼촌 라반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의 성장과정 가운데 고쳐야 할 비뚤어진 성격, 다듬어져야 할 인격 이런 것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인 거여요.

 

<위기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야곱은 20년 동안 이런 연단을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열심히 일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30장 43절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그리고 4명의 부인과 12명의 아들과 이런 풍부한 재산을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금의 환향입니다. 아마 야곱은 부모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대가 큰 근심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바로 자기 형 에서가 종 400인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 이제는 형 에서도 화가 풀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순전히 자기만의 생각이었어요...

여러분, 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적을 만들지 마세요!! 여인이 한번 노를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는데... 사람이 한번 악을 품으면 그것이 죽을 때까지 가게 되고 심지어 죽고나서 자손들에게까지 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모두와 화해하시고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형 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야곱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가족들을 이용해 이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형의 마움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가진 재산을 두 때로 나눠.. 한 때를 재물과 함께 먼저 보내고 또 한 때는 나중에 보냅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최종적으로 보냅니다. 이들을 다 얍복강을 건너 떠나 보내고 최종적으로 야곱 혼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 행동이 오늘 나온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인생의 최대 위기의 순간을 나타냅니다. 사실 야곱으로써는 성공하여 많은 자식과 재산을 거느리고 고향땅으로 오고 있었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그를 달갑게 맞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었어요. 지금 외삼촌에게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고향 땅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많으면 뭐합니까? 마음은 지금 천근만근 무거운데... 사람의 행복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하는데 돈으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위기 가운데 홀로 한 밤을 지새게 되는데 본문을 보니.. 밤이 깊은 와중에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이 사람과의 씨름이 야곱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자라고도 하지만 바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22절~24절 말씀입니다.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말합니다. 홀로 남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삶의 자리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런 자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메스미디어가 발달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홀로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을 성찰할 시간이 드뭅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경향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일대일로 섰을 때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그 시간이 기도의 야곱과 같이 절박한 기도의 시간이든, 묵상의 시간이든, 경건의 시간이든...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셔서 싸움을 거셨습니다. 여기서 씨름을 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레슬링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약시대 흔히 있는 현상으로 하나님이 혹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는데... 야곱이 이분에게 필사적으로 메달렸음을 말합니다.

야곱은 지금 너무 절박한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필사적 싸움을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겁니다. 너무 필사적으로 싸우니 하나님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조치가 환도뼈를 내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환도뼈는 엉덩이 관절인데 이 관절이 나가버리면 사람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관절을 치신거여요...

<모든 것을 꺽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려면 그냥하시면 될 것이고, 복을 주시려면 그냥 주시면 될 것이지.. 야곱의 환도뼈까지 치시며 다리를 절게 만드셨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자신을 맹신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자기의 한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안될 일이 없어!” “나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사실 지금까지 야곱의 일생을 보면 마음먹으면 안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치사하기는 했지만 기어이 그는 장자의 권한도 축복도 차지합니다. 마음에 둔 여인도 차지하고, 돈도 실컷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단 한번도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각 속에 “내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음대로 살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된다는 의식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런 모습을 다루신 것입니다. 환도뼈를 치셨다는 것은 단지 육신을 치신 것이 아니라 환도뼈와 같이 교만한 야곱을 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장자권, 축복, 가족, 재산 모두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좀 모자라고 없어도 하나님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퍼컷 한방 먹어도 힘이 다 빠져버리는데 환도뼈가 위골되었으니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연약함 가운데서도 야곱은 지금 자기가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손길 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사람의 옷자락을 붙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26절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날이 새려하기 때문에 나를 보내라고 말하지만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자락을 붙들고 뭐라고 말합니까?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셔야 나는 당신을 보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은 사실.... 신기루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으로 성취하며 사는 것이 진짜 복인 줄 알았는데 이제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 복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을 주세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당신 아니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랬더니 드디어 하나님이 야곱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에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이 물음은 야곱의 존재를 묻는 물음 입니다. 진일아 너는 누구니? 예 저는 야곱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남의 발꿈치나 붙들면서,, 남의 것이나 빼앗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너는 이제 야곱이 아니다. 약탈자가 아니야.. 더 이상 빼앗는 자가 아니야.. 너의 한계를 알고 나를 의지한다면 이제 이후로 너는 이스라엘이야...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야곱을 향해 새이름 이스라엘을 주신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야곱의 이름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야곱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나므로 이스라엘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예수 믿는 우리를 가리켜 ‘성도’라는 부릅니다. 저는 이 성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집사, 장로, 목사도 좋지만 성도는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성도라 부르지 않습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될 때 성도라 불리워 질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 아집을 버리고 한계를 깨달은 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그런 자가 진정한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믿음으로 사는 사람 운영자 2011.01.25 0 518
다음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복이다 운영자 2011.01.11 0 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