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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 크리스마스(12월 25일) | 운영자 | 2010-12-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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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8절~20절 첫 번 크리스마스 “첫번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롬부스의 공로를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아메리카는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근거리고 그의 등 뒤에서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콜롬부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 중에 이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제가 상을 드리겠습니다."하고 제안하였습니다. 모두들 그의 탁자로 몰려와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세우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콜롬부스는 그 달걀을 들고는 한쪽 끝을 이빨로 깨더니 쭉 빨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세웠습니다. 단번에 성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에이, 그렇게 하면 누가 세우지 못해.. 시시하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자 콜롬부스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제는 이렇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 처음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남보다 앞서 처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처음에 누군가가 길을 열면 그 사람을 따라갑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성탄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들도 모두 좋아하고 동양인도 서양인도 함께 좋아하는 복된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기대를 만족시켜 주는 신나는 날인 성탄절은 무슨 날입니까? 크리스마스도 첫 번째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 2000년동안 흘러 오면서 전 세계인의 명절이 되었지만 그리고 화려하고 요란하여졌지만 그러나 첫 크리스마스만큼 소중하고 감격스러운 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래의 성탄절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자리에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되어 나옵니다. 1. 성탄절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8) 이 성탄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식이 가장 비천하고 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인 평범한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당시에 목자들은 가장 천한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며 추운 밤을 떨며 들판에서 보냈습니다.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나운 짐승들이 사는 거칠고 억센 땅에서 양떼를 지키며 적은 보수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희생제사에 쓰이는 짐승을 키우는 종교지도자들의 고용인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식이 세상의 통치자인 왕에게로 직접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종교 학자들이나 레위인에게도 오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부자들에게 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낮고 낮은 지극히 가난한 목자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직접 들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도 위대한 소식을 가난한 인민에게 먼저 알리셨습니까? 이것은 구원자 예수님이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온 인류를 위해 오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10절 하반부에 천사가 말하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만약 예수님이 통치자에게 오셨다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셔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종교지도자들에게만 왔다면 우리 같은 죄인은 가까이 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목동에게 찾아오셨기에 누구나 예수님을 들을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은 그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 고린도 전서 1장 26절로 29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선택하실 때 사막의 구석에 숨어 지내는 모세를 발견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왕을 선택할 때도 가장 작은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미약한 집안의 가장 어린 아들인 다윗을 지목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어부와 세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평범하고 낮은 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를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그분을 영접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가장 존귀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졌다고 배웠다고 하나님의 부름받는 것 아닙니다. 비록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배운 것이 좀 없어도... 이 첫 번째 성탄의 소식을 듣고 겸손히 영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복된 자임을 믿습니다. 2. 성탄절의 메시지를 전한 설교자 자 그러면 첫번째 성탄 예배의 찬양대는 누가 했습니까? 천사들입니다. 첫번째 성탄 예배의 설교자가 누구입니까? 역시 천사입니다.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들이 왔을 때 목자들은 주의 영광이 갑자기 그들에게 비취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실체를 보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광채를 볼 수는 있습니다. 첫번째 성탄 때도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그들은 갑자기 주의 영광으로 둘러 쌓였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짐승소리만 들어도 두려워 등꼴이 오싹한 것이 인간입니다. 우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저주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크게 두려워 한 것도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도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한명의 죄인이 불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을 보았을 때 두려움에 떨며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 주므로 목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주의 천사가 첫 성탄에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목자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두려워 했으나 그 때 성탄의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들려왔습니다. "무서워 말라. ..기쁜 소식이 있다. 오늘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두려움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린이만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아가, 밖에도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그분이 널 지켜주실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분은 어디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주실래요?" 두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두려움과 비정상적인 두려움입니다. 정상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마음을 혼란시킵니다. 불안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 이유는 비정상적인 두려움 때문입니다.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반은 비정상적인 두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주원인입니다. 어떤 의사는 최근 그의 환자들 중에서 60퍼센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찾아 온 질병도 떠나갑니다. 다시 용기가 솟아나고 의욕이 솟아납니다. 기쁨이 충만해지며 사랑이 솟아납니다. 여러분의 두려움이 무엇으로부터 온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사단의 공격에서 자유케 되고 죄의 권세에서 풀려나 평안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만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강하게 하며 지켜 주시며 복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라고 했습니다. 첫 성탄절 때 천사가 전한 메시지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죽음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외로움이나 어떤 형태의 두려움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은 그 두려움을 충분히 치료하고도 남을만한 복음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성탄의 메시지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기쁨이 밀려오게 합니다. 죄가 용서되고 두려움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평안과 기쁨이 넘치길 축원드립니다. 대학생들에게 성탄에 가장 가지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로또 1등당첨, 취업확인통지서, 멋진몸매,키, 장학금, 애인,디지틀기계 등으로 꼽혔다고 하네요..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을 로또와 비견하리요!! 주심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참된 기쁨을 얻는 이 귀한 선물을 공짜로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성탄절의 메시지에 보인 반응들(그렇다면 이 성탄의 메시지에 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성탄의 메시지를 듣고 곧바로 행동 하였습니다.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듣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만약 그들이 들은 것으로 끝내었다면 불행한 사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경배하러 왔노라' 하였을 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정작 자신들은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이 들에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나아 갔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서둘러 갔다'고 증거합니다. 16절입니다.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자신이 돌보는 양떼보다 구세주를 뵙고 경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들과 동일하게 성탄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직업상 어쩔 수 없다.' '나는 가족에 매여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나는 경제적으로 곤란해서 할 수 없다. 그러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탄이 연례행사가 되고 맙니다. 하나의 추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성탄은 어릴적에 아니면 어떤 특정한 시기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말기에는 너무 놀랍고 귀한 사건이 아닙니까? 저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목자처럼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기를 소원합니다. 몸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삶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으면 합니다. 아멘~ 마지막 눅 2:20절을 읽어 봅시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은 다시 평상시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삶으로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뵙고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뵈온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메시지와 그들이 만난 아기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뵙고 돌아간다면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감격을 안고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새로운 결단과 변화된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가 나타나고 새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넘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고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속에서 올라오고 그로인해 확실히 변화가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일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모트는 37세까지 캐비닛 제조공으로 일했습니다. 이 사람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어느 겨울 그는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교회를 보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존 하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으로 ‘거듭나는 도리’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됐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여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춥니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습니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 소망은 산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행복한 목공으로 완전히 변화됐습니다. 삶도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일하던 목공소가 그의 소유가 됐고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모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고 예수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찬송가 539).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여러분, 성탄절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아닙니다. 카드도 아닙니다. 추억도 아닙니다. 그저 흥을 돋구고 신나게 즐기는 것도 아닙니다. 성탄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을 대신 정복해주려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고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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