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환자의 기도 | 운영자 | 2012-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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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4 나병환자의 기도 오늘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옛날 우리나라에도 나병이 성행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병은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전염병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이 나병은 성행했던 무서운 전염병중 하나였습니다. 나병은 아주 몹쓸 병입니다. 철저하게 격리시켜야 하는 병입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를 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병환자가 발생하면 소록도 같은 곳으로 격리를 시켰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환자들은 동구 밖으로 멀리 격리시켰습니다. 본문은 그렇게 격리되어 있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그 병을 고쳐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결국 그 병을 깨끗이 고침 받습니다. 이들이 그 무서운 나병에서 고침 받는데는 몇 가지 단계가 나옵니다. 이 단계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받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소식 들음>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 단계입니다. 나병환자의 소원은 그 무서운 병에서 “고침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빨리 고침 받아 가정으로 돌아가는 일이 최대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못고치는 질병이 없어시다더라“ “소경의 눈도 보게 하고, 앉은뱅이도 걷게 하신다더라” “나병환자도 고친신다더라” 이런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에게 이 소식보다 더 반가운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병도 고친다더라”. 나병환자들에게는 이 소식은 복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암에 걸려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자에게 암을 고칠 획기적인 치료법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그 소식이 복음이고,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사 52:7). 기쁜 소식은 빨리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전하고 싶어집니다. 마라톤의 기원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올림픽에서 마라톤은 거리가 42.195 km입니다. BC 490년 그리스와 페르샤 사이에 마라톤에서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마침내 밀티아데스 장군이 지휘한 아테네 군이 페르샤 군을 물리쳤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 그 먼 거리를 오이클레스라는 전령에게 승전보를 가지고 마라톤이라는 전쟁터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 전령이 뛴 거리가 42.195km입니다. 그 전령이 도착하여 “전하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라고 전하고 그 전령은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을 빨리 전해 주려고 달렸기에 심장마비로 죽었겠습니까? 그때 뛰어가 전한 것이 오늘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도 고친다더라” 얼마나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까. 이 소식이 복음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구원받고 고침 받고 은혜 받은 것은 이 소식을 들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병자들의 눈에서 희망과 소망의 빛이 번쩍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듣는가 하면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지금 간절함과 절절이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가 들리기는 들리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해도 아무나 듣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귓전으로 그냥 흘려보냅니다. 그것은 무관심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관심은 때로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고 듣고 관심을 갖고 마침내 찾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1장 3절에 보면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찾아감 (첫번째가 복된 소식을 듣는 단계였다면~) 두 번째 단계는 찾아가는 단계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을 들어도 듣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었으면 찾아가야 합니다. 지식과 행동은 다릅니다. 지식은 아는 것을 말하고, 행동은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당연히 찾아갔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찾아가려면 대단한 모험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땅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도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금지된 법입니다. 그 법을 어기고 동네로 들어가다가 발각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단한 모험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들은 그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혹시 가다가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도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갔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런 모험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열매는 이같은 모험에서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다 모험의 결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서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이 여인들을 집에서 나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모두 집밖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모두 집안에서 일만 하였습니다. 이화학당이 시작될 때도 여인들이 있는 집에 가서 사정하고 설득해서 두어 명 처녀들을 받아 학교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에 용기 있는 집안의 용기 있는 여성들이 처음 모험을 감행하였을 것입니다. 그 용기와 모험자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인 남궁억은 강원도 홍천이 고향입니다. 홍천은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없어질 때가 많은데, 그때 그는 먼저 일어나 길을 내면서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래야 뒤에 오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길을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졸업식 날 그분이 축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은 첫발자국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의 모험자는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그런 용기있는 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초창기의 선조들이 이 땅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깃발을 꼽게 된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것이고 존경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초창기에 얼마나 갖은 고통과 수고를 감내해야 했겠습니까?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주변의 많은 불신자와 친지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뎌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교회 황전도사님께서 저도 잘 몰랐는데 얼마 전에 교제를 나누면서 집안이 5대 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가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완전 초창기부터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초창기 믿음의 선조들은 그 자체만으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오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지 몰라요.. 물론 첫 발걸음을 멋지게 잘 내딛어야 할 책임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여러분 가운데 주변 가족 친지 불신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기 위해 이 자리로 달려 나온 것만으로 여러분은 위대한 모험, 가장 가치있는 모험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옆엣 분에게 인사.. “여러분이 위대한 개척자입니다”
이런 분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환경 가운데서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나라가 지난 주 세계에서 7번째로 20-50클럽에 가입을 한 나라가 되었어요. 국민소득 2만 불로 5천만 이상이 된 나라를 말합니다. 선진국이 많지만 대부분 인구가 적어 선진국이지 5천만이 넘는 인구로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가 많지 않아요.. 더군다나.. 1997년 IMF의 위기를 겪은 나라가 지금 전 세계와 경쟁해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대단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신앙으로 살려고 몸부림 친 결과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께 나아왔습니까? 그러면 멋지게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개척자가 되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이왕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했다면 대충대충 믿어서 손가락질 당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지 마시고, 정말 제대로 믿어 역사의 주역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신앙생활에 이런 용기와 결단이 있을 때 열매가 열리고 결실이 주어집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기적의 출발입니다. <부르짖음> (이처럼 나병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면) 세 번째는 어떤 단계인가? 바로 부르짖는 단계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모험해서 마침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13절을 보면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과 나병환자가 있는 곳은 간격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에 가까이 가질 못하고 멀찍이 서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서 외칩니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러자 어떤 일이 발생 했을까요!! 어렵게 어렵게 도착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이 사람들에게 집중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그들이 나병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완전히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웅성웅성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몸으로 이곳에 나타나” 하면서 어떤 사람은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빨리 사라지라고 고함을 지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일을 하는 데는 더 중요한 일일 수록 순조롭게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기적이 일어나는 일에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긴장된 순간입니까?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순간에도 이 나병환자들이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소리는 그냥 해 보는 형식적인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생결단하고 부르짖는 절규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고침 받지 못하면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평생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그래서 주석자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살아있는 기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통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절박한 사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생사를 건 부르짖음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동반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까 응답이 오고 기적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응답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라는 왕이 나옵니다. 이 히스기야를 보면 기도자의 부르짖음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시 열국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쳐들어 왔을 때의 일입니다. 산헤립이 이스라엘에 사신을 보내, 너희 왕 히스기야가 너희를 구하기에 너무 힘이 약하고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이라고 저주를 하며, 하루 빨리 우리에게 항복을 하라고 회유합니다. 전쟁은 대치상태에 있지만 그 비난은 점점 거세지고 군사들은 그런 회유에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군 통솔권자인 히스기야 왕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한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올라가 앗수르 왕이 보낸 서신을 펴놓고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도는 민족의 존립의 위기 앞에 드리는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소리를 들어시옵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여 천하 만국이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렸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 편이 되사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니..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간밤에 그 사자를 보내사 18만5천명을 치셨다고 기록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것 뿐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능력을 또 한번 맛보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병이 생기게 하여 생명을 거두어 가시겠다고 하셨을 때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는 어느 날 하나님이 그의 몸을 치십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어떤 질병인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암과 같은 심각한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더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칩거에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회개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제발 살게 해 주세요.. 이 병이 낮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사..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니다... 죽고 사는 것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건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건강 뺏아 가버리면 우리는 평생 고생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병이 생기더라도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이 낮게 하실 수도 있고요. 생명을 연장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제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하나님 젊어서 이렇게 일찍 죽으면 어떡합니까? 목사도 못되고 죽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60까지만 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할렐루야!!(렘33:3) <제사장에게 가라> 본문의 나병환자들은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모험으로 여기까지 와서 부르짖었습니다. 생사를 걸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어서 오너라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였느냐“고 하고 맞이하였습니까? 다른 병자들을 고치실 때는 그렇게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습니다. 혈루병자도 거기서 고침 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그 자리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그 현장까지 가서 손을 대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은 생사를 걸고 찾아왔는데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반갑게 맞아주신 것이 아니고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고쳐주신 것이 아니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곳에서 제사장에게까지 가려면 또 얼마를 가야 합니까? 여기까지 오는 것도 모험이었는데 또 제사장에게까지 가는 도중에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또 다시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때로 이런 모험과 순종이 요구됩니다. 신앙에는 때로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고 고침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이 같은 모험과 순종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신앙인들에게 모험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눈먼 소경이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먼 소경이 왔을 때 주님은 뭘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흙덩이를 눈에 바릅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참 잔인한 모습입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것도 잔인한 모습입니다.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면 얼마나 좋을 것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에게 거기서 거리가 먼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에게 굳이 그곳까지 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이 시험이었고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곳을 보면 한결같이 이같은 모험과 순종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병환자였던 아람장군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가면서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가면 반갑게 영접해 주고 손으로 만져서 고쳐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가니까 문을 열고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국방장관이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체면이 구겼습니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냥 돌아가면 병은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그때 수행했던 종이 강물에 가서 씻으라 하는 말이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더 어려운 일도 해야 할 것인데 한번 가서 씻어보라고 강권합니다. 그래서 가서 씻었더니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본문의 10명의 나병환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는 동안 도중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사람은 갈 수 없습니다. 가지 못하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못이기는 척하며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는 도중에 병이 낫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순종하는 순간 이미 응답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고침 받음> 그래서 결국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마침내 병을 고침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이 나병환자들이 고침 받고 각자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병은 사람들의 생각에 죄를 지은 자가 받는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저주를 받아 저런 심각한 병이 생겼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런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는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 온 사람들은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 찾아왔는데 누구도 그냥 돌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고침을 받고 다 회복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굿뉴스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문제를 주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요, 유한한 존재임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 사람에게 달려가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에게 가면 조금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나병환자와 같이 예수님께 달려가십시오. 예수님께 달려가 여러분의 얽히고 매였던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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