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 운영자 | 2012-06-27 | |||
|
|||||
누가복음 17장 1절~ 4절 용 서 <악해진 세상, 강팍한 세상> 어느 날 부부가 매일 싸웠다고 합니다. 부인이 너무 강하고 고집도 셌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부부는 교회 집사였습니다. 교회 부흥회가 있던 날 바쁜 일이 있어서 남편에게 당신이나 갔다 오라고 하고 부인을 가질 않았어요. 그런데 남편이 교회 부흥회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이상해서 이 부인이 부흥강사가 무슨 말씀을 전했길래 저렇게 변화 되었는가 해서 목사님께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어제저녁 무슨 말씀을 전했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어제 설교제목이 원수를 사랑하라”였다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명암이 뚜렷한 시대입니다. 한편으로 이 세상은 참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편리하고 풍부하고 신속하고 발달된 그런 시대입니다. 요즘 저희들이 가지고 다니는 이 스마트폰이 인간의 생활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는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식사자리에 앉으면 서로 얼굴 보며 이야기하기 바빴는데.. 그런데 요즘은 식사 자리에 앉으면 너나나나 스마트폰 꺼내가지고 그것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아는 지인과 SNS 하면서 연락을 주고 받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몸은 중국에 있는데 전세계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나라의 모 기업에서 인간의 인체에 칩을 이식시켜서 원격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미국특허청에 특허를 출현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아시는 분들에게 앞으로 이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다녔거든요. 앞으로는 언어 공부할 필요도 없게 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이식된 칩이 번역해 바로 인식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굳이 언어를 하지 않아도 될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겁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666시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것까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떻든 우리의 시대는 정말 편리하며 살기좋은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 오늘날 시대는 또한 악한 시대가 되어가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들이 우리주변에 일어나고 있어요. ‘어떻게 사람으로써 저런 죄를 지을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자살이 늘어나는 것도 세상이 문제가 많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학교폭력 이제 정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해지다보니 교회 다니는 성도들까지 마음이 악해지고 강팍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끼리 한번 갈등이 생기면 잘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해결이 안 되고, 회복이 안됩니다.. 매듭이 생겼으면 풀려고 해야 하는데 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이 오늘날 시대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가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먼저 믿은 우리를 향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여기서 실족이라는 말은 “스칸달론”이라는 말인데...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는 덧, 올무, 함정을 말합니다. 여기서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이 실족이란 우리의 행위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행동을 잘한다고 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해로 인해 아픔을 겪는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일전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 성도님이 지나가면서 목사님께 인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예배마치고 여러 성도들과 인사를 나눈다고 그것을 보질 못한 거여요.. 그런데 이 성도님은 목사님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실족해가지고 그 다음날 부터는 목사님을 보아도 피해버리고 인사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정말 사랑합니다. 제 몸이라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상처받고 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사람이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족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실족케 하는 사람>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는 자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온전한 자가 없기에.. 실족하는 경우가 발생하지만.. 그것 깨달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관계를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 사람에게 미칠 화가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는 심판을 나타내는데 그 심판이 무엇인가요? 2절에 그 심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 정도로 누군가를 실족케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연자 맷돌은 짐승에게 멍에를 씌워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그것을 목에 매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고대 로마시대와 그리스에서는 맷돌을 매어 바다에 던져 사형시키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 만큼 큰 죄라는 것입니다. 큰 일로 상대방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을 일로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내 뱉은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주님은 “작은 자에게라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자는 ‘어린아이,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들, 병자들’ 이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칫하면 무시할 수 있는 대상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무시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들을 실족케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주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주님은 어리다고,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하대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다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그들을 더욱 챙기셨고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필요를 체워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그들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들이 이런 보살핌이 없으면 너무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와같은 ‘소자’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그런 자세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모임에 가보면 대화의 주제가 “집이 얼마니.. 옷은 얼마짜리니..차가 어떻고” 소위 가진자의 대화입니다. 그런 주제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 주제에 공감대가 형성한다면 그 말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대화의 주제로 아픔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집값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집값이 지위에 따라 천차반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집값이 이만원 삼만원 이러는 거여요.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수준에 그런 이야기는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성도 한분이 이런 말을 하던데 가슴이 뜨껌 하더라고요. “집사님 그 집값은 우리 집 전체수입인데요” 그 집값의 십일조로 저희들은 살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대화가 모인 다른 지체를 조금이라도 배려할 수 없을까요? 그들이 나의 대화를 듣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를 받는 그런 모임이 될 수는 없을까요? 소자를 배려하는 태도, 마음의 자세 이것이 제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직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직분은 섬김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그 직분이 섬김이 아니라 대접받는 위치가 되어버린다면 분명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고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일까요? “은혜의 교회는 좋은데 그 교회 누구누구 때문에 교회 나가고 싶지 않아!!” 실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절대 죄없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에게 화로다!!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구원받기로 작정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내가 주님께 소중한 존재이듯... 연약한 그 영혼도 동일하게 소중하다!!” 내가 소중하듯... 연약한 그 영혼도 동일하게 소중한 줄 알아야 해요.. 우리의 가정도 그러합니다. 내가 주님께 소중하듯 내 아내도 주님께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그 영혼을 실족케 하지 말고 귀하게 여겨야 해요.. 만약 여러분의 남편 아내가 여러분 때문에 교회나가기 싫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그 죄를 어떻게 씻겠어요... 여러분의 자식들이 여러분 때문에 교회나가기 싫다고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만약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우리 부모님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안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에요!”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떡하겠어요.. 만약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진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계 속에 이러한 소자를 향한 배려의 자세 섬김의 신앙이 회복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상처받은 사람> 또한 이어서 용서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3,4절 말씀입니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주님은 혹 죄를 지은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용서는 말은 쉬운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여전히 외치십니다. “용서하라”고.. 심지어 그 죄를 지은 당사자가 하루에 일곱 번씩 찾아와 용서를 빌면 일곱 번 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18장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무한수입니다. 무한대의 숫자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3번 용서하는 것을 최고 수준의 용서로 생각했는데 우리 주님은 그 제한을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 쉽지 않습니다.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하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무슨 염치로 또 찾아와!! 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찾아와도 그런 자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이것을 봐서.. 용서라는 것은 순종의 영역이지 이성의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용서는 순종의 영역이지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은 “말씀하시니 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깊은대서 그물을 던지리이다”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내 생각으로 지금 던져도 소용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 던지겠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순종이 꽃입니다. 순종이 믿음을 만들고 순종이 기적을 만듭니다. 어느 수도사가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를 데리고 밭에 가서 배추포기를 주면서 이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배추를 똑바로 심었습니다. 거꾸로 심으라고 해도 자기주장대로 계속해서 똑바로 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순종을 요구했지 이론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신앙의 삶에는 때로 내 이성으로, 판단으로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내 이성으로 내 판단으로 이해되는 것만 추구하면 그것은 과학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 뼈가 굵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지만 완전히 허탕을 쳤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주님이 그물 씻는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잡는 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니.. 한 번 더 던져 보겠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고, 나의 경험, 나의 자존심과 달라도. 주님 말씀이기에 일단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에요.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혼자 끌어올리지 못하는 고기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은 놀라운 이적을 일으킵니다. 용서.. 어떻게 끊임없이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성령을 힘입어 용서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몇주 전에 윤항기 목사이야기를 했쟎아요. 윤항기묵사가 방황할 때, 집나가 바람피우고 있을 때, 그때에도 부인은 한번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끝까지 용서하고 기다려 주었더니 결국 집으로 돌아왔고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쟎아요. 용서는 이런 놀라운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함> 사실 여러분,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 하나요? 용서가 진짜 필요한 이유는 상대방을 위해서라가 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가 불편할 것 같아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불편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 내 마음에 불화가 쌓입니다. 분노가 생기게 되고, 화가 나게 되고 기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 생각하면 밥맛도 없어요, 재미도 없고요. 잠도 잘 잘 수 없어요.. 결국 나중에 신앙생활에 까지 영향이 돌아오게 됩니다.. 기도도 잘 안되고요.. 결국 누구 손해입니까? 내가 손해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 아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용서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자 테니스 스타였던 마르릴 힝기스라는 테니스 신동이 있었습니다. 1999년 윔블턴 대회에서 세계랭킹 1위였던 그가 16세의 무명의 선수에게 52분 만에 0:2로 참패를 당했습니다. 윔불턴 대회사상 최대 이변이었습니다. 전날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돈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것입니다. 더구나 경기 도중 그의 어머니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을 본 힝기스 선수는 마음의 감정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선수는 무명의 상대방에게 참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30절 말씀에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용서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침울해 하고, 잠을 못 이루고,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슬퍼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바로 우리 주 성령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였는데 너는 왜 용서하지 못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 부모들이 가끔 그런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게 됩니다. 자식들이 밖에 나가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집에 와서 우울해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는 심각해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 모습 보면 부모는 속이 상하게 되고, 아이에게 툭툭 털어버리고 잊으라고 말은 하는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쉽게 털어 버릴 수가 없어서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성령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본받음>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며 사는 것이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사역 동안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이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각종 문제를 가진 사람. 병자들 주님께 몰려왔을 때 그들을 마다하지 않고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피곤해도 다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밝게 웃게 해서 보내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 묻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느냐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내면의 상처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집니다. 이 시대에는 따지지 않고 그냥 받아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부인은 택시를 타고 전설의 고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전기사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예술의 전당 앞에 내려 주었습니다. 잘못 말한 것 인 줄 알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봇 휴만이라는 분은 프랑스에서 법률가로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을 지내고 1970년에 수상까지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급정거하는 바람에 옆에 있는 어느 부인의 발을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이 개가 짖듯이 이 병신아, 눈 뒀다 뭐하느냐, 눈에 이 발이 보이지 않더냐 하고 욕을 했습니다. 미쳐 사과할 틈도 없이 당황하고 있는데 이 여인이 얼굴을 들더니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선생님 실례했습니다, 나는 남편인줄 알고 그만”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 분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실족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가정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이웃에서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내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고.. 아픔을 찌르며..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바로 나 자신 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용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네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용서를 빌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여러분, 우리는 이 용서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약함으로 남을 실족케 만드는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나의 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나를 이기고 남도 이기게 만드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용서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용서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허물과 죄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만들어 주신 주님.... 이 용서를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들 또한 이 용서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그러나 성령님 의지하여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회복될 것이고, 인간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상한감정이 치유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실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댓글 0